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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으로 세상보기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회장님을 생각하며


하성호(사도요한)|신부, 교구 사무처장

책을 읽다가 다음의 구절에 진하게 밑줄을 그었다. “우리 시대는 역사가 없다. 사람들은 과거를 기억하고 거기서 배우려 하지 않는다. … 지금 이 순간 꽉 움켜잡은 것에 집중한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다. 역사는 오늘의 토대이고 미래의 영감인데 말이다.

교구 100주년 당일인 4월 8일(금) 우리 교구는 10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서상돈(아우구스티노) 회장님의 흉상제막식을 가졌다. 과거의 한 인물을 단순히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분의 신앙의 숨결이 우리 교구의 역사에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서상돈 회장님의 가문은 조선시대 명문이었다. 하지만 그분의 증조부께서 국법으로 엄히 금하던 천주교를 봉행함으로써 가문으로부터 축출을 당하게 되고, 교난을 피하여 강원도·충청도·경상도 산간지역을 떠돌며 화전이나 옹기굴 막일로 목숨을 부지한다. 그런 와중이던 1850년(김천 마잠) 옹기굴 막일꾼이셨던 부친(서철순)의 맏아들로 그분은 태어나신다.

그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부친께서 별세하시고, 병인박해(1866) 때에 삼촌 인순(시몬)과 태순(베드로)께서는 순교하신다. 천주교로 인해 가문이 거센 풍파에 시달리는 것을 바라본 어린 서상돈의 가슴에 파고든 그 통한은 얼마나 처절하였겠는가? 가슴에 무엇을 새겼을까? 천주님에 대한 원망이었을까, 아니면 뼈에 사무치는 신앙이었을까?

천주교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바닥인생을 살던 그에게 공교롭게도 천주교인의 도움의 손길이 뻗쳤다. 그는 신자의 도움으로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성실히 일한 결과 후일에 거상이 되었다. 그가 모은 재물로 보아 얼마든지 위세노름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 가슴에 신앙의 피를 묻고 있었기에 그분은 그렇게 호의호식하는 삶을 살지 않으셨다.

그는 1885년 신나무골에 거주하신 김보록 신부님이 복음을 힘껏 전파하시도록 철저히 보필하셨고, 성당 지으시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도 하셨다. 막대한 재산을 봉헌하여 세워진 대구 최초의 십자형 기와성당이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그 안타까움은 어떠했을까! 그 자리에 다시 성당을 세우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으려 하였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고리의 사채를 빌어 공사를 완공시키고, 남은 빚의 상당액도 자신이 부담하셨다.

1911년 조선대목구가 분할되어 남방에 또 다른 대목구가 설정될 때 대구에 대목구가 설정된다면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교구를 돕겠다는 그분 중심의 유치열정이 남방대목구가 대구에 설정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자신의 땅 약 1만평을 교구에 쾌척하셨다. 그 땅 위에 초대교구장 드망즈 안세화 주교님께서는 교구청을 세우시며 대구교구를 하느님께 의탁하시고 교구의 미래를 활짝 여셨다.

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은 대구대교구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일찍이 서상돈 회장님이 가슴에 품으신 바로 그와 같은 신앙이다. 그분이 품으신 그와 같은 신앙이 대구대교구의 역사이어야 하고, 그 역사가 바로 살아숨쉬는 대구대교구의 삶이어야 한다. 물론 서상돈 그분의 삶에도 오점과 후회가 없었겠냐마는, 그보다 그분이 가슴에 품은 바로 그 신앙이 교구 100주년을 맞은 현 시점에 너무나 값지고, 또한 절실히 필요하다 하겠다. 그분이 남긴 신앙의 족적을 되돌아보며 역사는 오늘의 토대이고 미래의 영감임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본다.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 1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