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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기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의 성령의 망각


조현권(스테파노)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2) 중세에서 트리엔트 공의회까지의 성사론

다) 종교개혁가들

 

일반적으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신앙상의 차이는 개신교회는 말씀의 교회이고, 가톨릭교회는 성사들의 교회라는 점을 든다. 종교개혁가들에게 성사는 무엇보다도 사람이 신앙 안에서 응답해야만 하는 선포말씀의 형식으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성사가 아니라 성사의 신앙이 정당한 것이다.”라고까지 한다.

 

* 루터

루터(Luther)의 언명에 따르면 성사들은 “하느님 자신이 설립하시고 제정하신 가장 높은 예식들이다. 그 예식들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보증한다.”사람은 성사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신앙은 성사를 통해서 강화된다.

 

그런데 루터의 성사론은 로마(가톨릭)교회와 벌인 그의 전 논쟁을 통해 전개된다. 그에 따르면 성사를 도구로 하여서는 의화에 도달하는 것은 믿음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그는 ‘opus operatum’, 즉 성사는 집전자의 성덕으로 이루어진다는 ‘성사의 사효성(事效性)’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성사를 하느님의 말씀에 부속시키고, 성사와 하느님의 말씀 둘다 은총의 관리자로 파악한다. 때문에 그는 (설교 안에서) 선포되어진 하느님의 말씀이 성사와 마찬가지로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내주하심과 마침내 영생에로 이끄는 효과를 가졌다고 확신한다.

 

그는 본래적인 성사들의 수를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에 한정시키는데, 이때 고해성사를 세례성사에 귀속시킨다. : “나는 사람들이 기름들을 복음에 맞게 쓴 경우(마르 6,13; 야고 5,14) 괜찮다고 여겼다. 하지만 거기에서부터 하나의 성사를 만드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성사도 혼인과 사제직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 게다가 그것들은 그 자체로 충분히 거룩한 것들이다. 과연 그렇게 참회는 세례의 실습과 힘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례성사와 성체성사 두 성사가 남는다. : 성령은 복음 안에서 죄의 용서를 충분히 나타내시는데, 이 복음과 나란히 있고 행해지는 것은 세례와 주님의 만찬이다.”

 

* 쯔빙글리

쯔빙글리(Zwingli)와 칼빈(Calvin)은 루터의 견해에 비하여 성사를 하느님의 말씀에 더 종속적인 것으로 여긴다. 루터가 성사를 하느님의 말씀에 부속된 것으로 보면서도 성사와 하느님의 말씀 둘다 은총의 관리자로 파악하였던 반면, 쯔빙글리와 칼빈은 성사는 하느님의 말씀처럼 은총을 전하는 관리자가 아니라 단지 은총을 표현하는 도구라고 생각하였다.

 

쯔빙글리는 성사개념이 그 개념을 통해 표시된 실재에 충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세례와 성찬례만 성사에 속한다고 여긴다. 그에게 성사는 은총을 선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은총을 명백하게 하는 도구이고 표현이지 구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 칼빈

칼빈도 역시 성사의 수를 세례와 성찬례에 한정시키지만, 성사에 대한 사상은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도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성사에 있어서 인간에게 하시는 (은총의 선물로서의)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께 대한 (신심으로서의) 인간의 응답을 중요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성사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신심의 증명과 더불어 외적인 표지를 통하여 증명된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은총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 “성사는 외적인 기념의 표(symbolum)로, 이 표로써 주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한 믿음을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의 양심에 우리에 대한 당신 우정의 약속을 봉인하신다. 그리고 이 표로써 우리는 다시금 그분에 대한 우리의 신심을 그분과 천사의 면전은 물론이고 우리의 면전에서 증언한다.”

 

칼빈에 따르면, 성령의 업적이며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은 성사수령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 : “그러므로 말씀은 물론이고 성사들 또한 우리에게 우리에 대한 천상 아버지의 선하신 의지를 눈앞에 둠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며, 그러한 인식을 통하여 우리 믿음은 견고하게 지속되고 힘을 더하게 된다. 그에 비하여 성령은 (말씀과 성사들을 통하여 작용한) 그러한 확신을 우리 마음 안에 심으심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그로써 그 확신을 효과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성사의 활동은 성령의 활동에 의존하는 것으로, 성령께서는 당신 빛으로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원인은 성사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사들 안에서는 구원을 위한 작용인(作用因) 혹은 도구인(道具因)도 없는 것이다.

 

* 트리엔트 공의회

종교개혁 이론에 반대해서 또 가톨릭교회 내에서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사일반론과 성사각론에서 전적으로 성사들에 있어서의 은총의 작용과 원인에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이로써 성사에 있어서의 인격성과 공동성의 전망에는 소홀히 하게 된다.

 

공의회는 아우구스티노에게서 유래하는 정의를 토대로 성사를 묘사하기를, “성사는 그 자체로 거룩한 사물의 명백한 표지, 즉 거룩하게 하는 은총이다. 성사는 - 하느님으로부터 제정되어 - 단순히 은총을 표시할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은총을 생기게 할 힘을 가진 것이다. 성사의 명백한 것에는 두 가지 전망이 포함된다. 첫째, 눈에 보이는 것으로 물질의 특성을 소유한 요소들(물, 빵, 포도주, 성유, 기름), 둘째, 귀에 들리는 형상을 표현하는 말씀이다. 말씀을 통해서 요소는 비로소 말씀이 가진 원래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의화의 원천은 하느님이신데, 이 의화의 도구가 성사이다. 성사는 인간을 성화시키는 신적인 은총의 통로”라고 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이 언명이 그 이후의 약 400년 간의 가톨릭 사상을 규정하게 된다.

 

(다음 호에서는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의 성령의 망각’ 마지막 부분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성사론’과 ‘현대의 성사론’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 다음 호부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의 성령의 재발견’에 대해서 다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