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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삶을 살며
베라노의 행복가꾸기


우주정(베라노)|남산성당, 대구시청 가톨릭신우회 총무

지난 호에 소개된 『베라노의 탈출기』에서 밝힌 대로 9년 전 사순시기에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지긋지긋한 알코올중독에서 탈출하였다. 그 후 매일 미사참례와 기도로 주님을 가까이하며 부활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베라노의 행복가꾸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때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지나친 음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몸이 쇠약해져서 식은땀을 자주 흘렸고, 밥숟가락을 잡은 손이 떨렸다. 대출금을 갚기 위하여 집을 팔았다. 가족들과의 대화가 끊어졌고, 직장 동료는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친구들도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기도하며 술의 유혹을 간신히 이겨내고 있었지만, 금단현상으로 무기력증에 빠져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지냈다.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게 싫어서 바른길도 돌아갔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 힘없는 목소리, 흐려진 눈동자, 축 처진 어깨너머로 절망의 골이 너무 깊게 패어 있었다. 잠 못 이루던 새벽에 곤히 잠든 아내의 모습을 보며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 몹쓸 짓을 많이 했다 싶어 아내와 자식에게 한없이 부끄러웠다. 내가 먼저 변하기로 수백 번 다짐하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간단한 샤워를 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였다. 혼자서 드리는 기도가 무척 힘들었다. 마음만 앞설 뿐이고 금세 온몸이 뒤틀리고 분심만 가득했다. 꾹꾹 눌러 참기도 하고 중도에 그만 둔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다음날 정해진 시간에 십자고상 앞에 다시 앉았다. 새벽 5시에 혼자서 아침밥을 차려 먹고 집을 나서서 성당의 첫 미사에 참례하고 곧바로 출근하였다. 사무실 일이 바빠서 늦게 퇴근하는 날은 ‘저를 새벽에 깨워주시고, 첫 미사에 꼭 참례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며 잠을 청하였다. 늘 잠이 부족하였다. 졸음을 이겨내려고 겨울에도 양말을 물에 적셔서 신었다. 신체 리듬이 아주 조금씩 적응되면서 사고도 많이 바뀌었다. 하루 이틀 사이는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달이 가고 해가 갈수록 엄청난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하느님과 가톨릭신앙에 대하여 좀 더 알고 싶고, 기도도 더 잘 하고 싶은 욕구였다. 인터넷으로 평화방송 TV의 “영성의 향기” 프로그램을 자주 보았다. 어떤 강좌는 스무 번을 넘게 보았다. 향심기도 TV 강좌를 보고서 따라 하다가 용기를 내어 피정에 참가하였다. 휴가를 얻어 2박 3일 소개피정부터 9박 10일 심화과정까지 다섯 차례의 피정을 한티 피정의집, 서울 돈암동의 상지 피정의집, 논산에 있는 씨튼 수녀회 영성의 집 등으로 다니며 참가했다. 그 외에도 이문희 대주교님과 함께하는 성삼일 특별피정(2007년 4월)에 참가하기도 했고, 여름휴가 때에는 마산 가르멜 수도원으로 개인 피정도 갔다. 피정 프로그램을 통해 배우는 것도 많았지만 함께하신 분들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웠다. 돌이켜 보면, 주님께서 장기간 연가를 얻어 피정에 참가할 용기를 주셨고, 여름휴가 때마다 피정지로 나를 이끄신 것으로 믿어진다.

그렇게 매일 새벽 20-30분씩의 기도생활을 꾸준히 이어갔다. 새벽기도와 매일 미사참례를 시작한 후 2년쯤 지난 2004년 여름의 일이다. 아침상을 차리면서 유리로 된 냄비를 깨뜨렸다. 예전 같았으면 ‘하필이면 냄비를 이곳에 두었을까?’하는 후회와 ‘아침부터 재수가 없군.’하고 크게 당황했을 터인데, 그날은 ‘어, 냄비가 깨졌네!’ 할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치웠다. 한참을 지나 생각해보니 ‘참 많이 바뀌었구나.’싶었다.

술을 끊고 나서 차츰 제 정신이 든 것이다. 그동안 큰 고통과 숱한 시련을 안겨준 아내와 자식에게 보속하는 자세로 가정에 충실하였다. 무엇보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내가 보험회사에 취업하게 되면서 집안일을 도와야 할 처지가 되었으나, 라면도 잘 끓여 먹지 않은 터라 몹시 어렵고 귀찮았다. 그러나 기도와 미사참례로 내적인 변화를 경험하면서 아내를 기쁘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였다. 인터넷에 있는 요리방법을 출력하여 싱크대에 붙여 놓고 배우기도 하고 아내에게 물어가며 요리를 하나씩 익혀갔다. 휴일에는 아내가 늦잠을 자도록 자명종 시계를 치웠다. 혼자서 아침상을 차려 놓고 깨우면 아내가 미안해 하면서도 좋아하는 것 같아 나도 덩달아 기뻤다.

요즈음은 주방에서 보조역할도 자주 하는데, 주방 일을 함께하면서 대화도 하고 또 귀찮은 일도 도와주니 아내도 내심 좋아하는 것 같다. 10년이 넘도록 아내가 보험 설계사를 한다는 말을 남에게 잘 하지 않았다. 요즈음은 조심스럽게 주변에 알려서 가끔 보험 판매도 도와준다. 이전에 아내는 “남편이 술만 마시지 않으면 걱정이 없겠다.”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요즈음은 동기생들로부터 “너는 어떻게 해서 늙지도 않느냐?”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한다. 그때마다 아내는 “남편이 잘 해주어서 그렇다.”라고 대답한다고 했다.

혼자 초저녁에 일찍 자고 새벽에 출근을 하다보니 가족들과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욕실 입구에 화이트보드를 걸어 놓고 전달할 내용을 메모하였다. 처음엔 “몇 시에 깨워 달라.”, “누구에게서 전화가 왔다.”등의 간단한 용건만 적었으나 차츰 익숙해지면서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자주 적었다. 일 년쯤 지나서는 “사랑하는 마리나님!”으로 머리글을 적었다. 3년쯤 지나서는 “사랑한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왔다. 쑥스러워 눈길을 피하고 포옹을 뿌리치던 아내도 이내 적응되어 호흡을 맞추어 주었다. 지금은 포스트잇에 쪽지 편지를 쓰고 전화 통화나 휴대전화 문자로도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 주일에는 가족이 함께 모여 촛불을 켜고 기도를 바친다. 가정을 위한 기도, 자녀를 위한 기도, 부모를 위한 기도 등등 기도소리가 행복을 부르는 소리로 들린다.

딸아이가 대기업에 입사했다. 어떻게 합격할 수 있었느냐는 고모의 물음에 “아버지의 기도 덕분입니다.”라는 대답을 방문 앞에서 몰래 들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콧등이 시큰해졌다. 칼바람 부는 겨울 새벽에 성모당에서 기도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느라 혼이 났다. 혼자서 서울 생활을 하는 딸과 부모의 관계를 말하면 듣는 사람이 두 번 놀란다. 2년이 넘도록 딸이 사는 곳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말에 놀라고, 아버지가 매일 새벽 모닝콜을 하고 사랑의 대화를 나눈다는 말에 또 한 번 놀란다. 매일 새벽 통화에서 건강이나 기분 상태가 어떤지 알아차리고 그때마다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도 하고, 인내와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도 한다. 맑은 정신으로 하는 짧은 통화에서는 늘 좋은 말만 하게 된다. 사랑한다는 말에 ‘미 투!’라는 대답을 듣고 통화를 마친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아들이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다 새벽에 귀가하는 날이 가끔 있다. 새벽기도를 하고 있을 때 들어오기도 한다. 촛불을 켜고 기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상상하며 꾸지람하고 싶은 마음을 달랬다. 나보다 키가 더 큰 아들을 안아주기도 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가끔 한다. 아들에게서도 조금씩 변화가 보인다. 작은 변화가 이어져 속이 꽉 찬 청년으로 성숙하기를 기대한다.

술을 함께 마시던 친구들과의 관계가 점차 멀어지면서 성당 교우들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본리성당 시절 레지오마리애 단원들과 매월 1회 성요셉재활원 목욕봉사를 시작한 것이 벌써 8년이 지났다.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 내 허벅지 위에 상대의 발을 올려놓고 씻기기도 하고 팔로 얼굴을 감싸 안고 머리를 감기기도 한다.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며 함께 노래도 부른다. 내가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재활원 친구들을 생각하며 힘을 얻곤 한다.

직장에서의 업무처리 자세도 많이 바뀌었다. 우선 맑은 정신으로 일찍 출근하여 일과를 시작한다. 매일의 침묵과 기도를 통하여 외부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평상심을 유지하고, 사고의 유연성을 갖도록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 같다. 업무처리를 잘못하였을 때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자식 또래의 직원에게도 반드시 사과한다. 동료나 상사에게 미운 감정이 생기면 그분께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어 달라고 기도드린다. 내가 바뀌니 상대도 바뀌어 편한 마음으로 즐겁게 일할 수 있다.

대구시청 가톨릭신우회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였다. 이정효(예로니모) 지도신부님께서 소공동체 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셨고, 2005년 11월에 직장 소공동체를 만들어 복음나누기를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매주 꼬박꼬박 주회를 하고 있다. 교구 100주년 기념으로 “제28회 전국가톨릭공무원피정”을 대구에 유치하였다. 오는 5월 28일(토) 엑스코에서 열리는 피정에는 행정안전부와 전국의 지방자치단체 소속 가톨릭 신자공무원 4,500여 명이 참가할 예정이다. 참으로 큰 은총이라 생각한다.

자기계발에 관한 책을 보면 자신의 인생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성 있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알려준다. 자신의 목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여 늘 휴대하고 다니며 자주 읽고 신념화하라는 것이다. 궁리 끝에 인생 목표를 “그리스도적 사랑의 실천과 전파”로 정했다. 아직은 여러모로 부족하고 갈 길이 멀지만, 주님께 의탁하며 겸손한 실행력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려고 한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 지금 살아가는 모습을 이번 전국가톨릭공무원피정에서 발표할 계획이다. 새벽녘 고요 속의 침묵과 기도로 주님께서 내 마음의 밭에 행복의 싹을 틔워 주신 것 같다. 그 싹이 자라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다시 씨앗이 되어 널리 퍼져 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