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동네 같은 국가
국가 간 경계를 넘나드는 곳에 경비초소 하나 없었다.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 지역표시를 해 놓은 것처럼 도로 표지판에 나라이름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국가의 개념이 없는 듯하였다. 한 국가와 다를 바 없었다. 언어소통에 별 어려움이 없고 동일한 화폐를 사용한다 해도 이상하고 이해되지 않았다. 물건을 별로 구매해 보지는 않았지만 물가도 거의 비슷한 것 같았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운 이론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우리 일행은 벨기에 기사가 운전하는 벨기에 버스로 암스테르담에서 바뇌로 이동하였고, 같은 버스로 바뇌에서 프랑스 파리로 갔다. 한 사람이 3개국을 제재와 간섭 없이 달리고 있었다.
다만 조금은 불편하고 시간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은 현지인들의 종교행사에 3개 언어가 사용된 점이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그리고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특히 벨기에는 공용어가 3개이므로 일상생활에 조금은 불편이 따를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모든 것이 유럽연합이라는 한 울타리를 만든 결과로 여겨졌다. 우리는 지금 같은 민족이면서 남북으로 갈라져 여전히 통일을 못하고 있는데 국가 간 통합을 이루어 자유로운 왕래를 하는 모습이 정말 부러웠다. 자동차는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데, 국적 표시는 자동차 번호판 앞부분에 국가명 첫 글자를 적어두었을 뿐이었다. 입국·출국 절차도 없고 모든 이동이 자유로웠다. 마침 여름 바캉스 철이라 유명 휴양지를 향해서 달리는 자동차들의 국적이 다양하여 부럽고 신기하였다.
서구 문명을 본받아 신식교육을 받은 세대로서 미국 일변도의 교육에 한계를 경험하였다. 우리가 다니는 순례지역에서는 영어가 홀대를 받고 있었다. 유창하지는 않지만 짧은 언어를 구사하여도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고, 상대방은 영어를 무시(?)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벨기에는 그래도 약간 소통되었으나 프랑스는 어려움이 많았다. 주민들이 영어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른 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몽마르트르에서 바라본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 최초의 주교 디오니시오 성인이 순교한 몽마르트르에 도착했다. 파리를 연상하면 예술을 떠올리고 특히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밑바닥 예술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몽마르트르라는 말을 들어왔다. 또한 이곳은 예술뿐만 아니라 순례자들의 발을 잡는 예수 성심 성당이 있었다. 이 성당은 디오니시오 성인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하여 파리 시민들의 모금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언덕 높은 곳에 위치한 성당은 장대하고 웅장하게 눈앞에 다가왔다. 성당의 규모는 길이 100m에 4개의 둥근 천정과 지상 65m에 달하는 한 개의 주 원형 천정으로 덮여 있었고, 높이가 91m에 달하는 종탑에는 서유럽 최대의 종이 걸려 있는데 무게가 약 18톤 정도라고 하였다.
높은 언덕에서 바라본 파리는 방사상의 원형도시에 가까웠다. 높지 않는 석조건물들이 질서정연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언덕에서 내려와 도로에 접어들자 어리둥절하고 방향을 알 수 없었다. 같은 종류의 건물들과 특색 없는 도로들, 비슷비슷한 가게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간판들은 혼돈 상태로 만들었다. 함께 걷는 아내에게 “파리 시민들 정말 기억력 좋다.”고 하였더니 인정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엔 똑같은 집이고 스카이라인이 동일하여 집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성모발현 성지순례 중 보너스 성격으로 파리 관광을 할 수 있었다. 우선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작품 《노트르담의 꼽추》로 유명한 노트르담 대성당을 찾았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파리 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파리의 중심 부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노트르담이란 ‘우리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파리를 성모님께 봉헌한 기념 성당이라고 하였다. 규모는 우리의 성당과 비교할 수 없고 역사 또한 역시 비교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성당 가운데 오래된 것이라면 대개 100년 정도인데 이곳은 1000년 정도이니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성당의 수용인원도 9000명 정도라 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우리 일행은 성모님의 보살핌과 주님의 은총을 듬뿍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마침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드물게 일반에게 공개되는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을 볼 수 있었다. 상자 안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모습에서 경외심과 아픔을 함께 느꼈다. 평소 묵주기도를 할 때 느끼지 못했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 쓰심을 묵상합시다.’고통의 신비 3단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다.
기적의 메달 성당
파리에는 성모님과 관련되는 곳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안내된 곳은 기적의 메달 성당이었다. 기적의 메달 성당은 1830년 11월 27일 까트린느 라부레 수녀에게 성모님이 발현한 곳으로 인간 모두에게 내리는 은총과 구원의 상징인 기적의 메달을 준 곳이었다. 성당 제대 오른쪽 아래에는 라부레 수녀의 시신이 모셔져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 일행은 미사를 드리고 은총을 가득 받은 얼굴로 서로에게 축하와 축복을 기원하는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다. 가까운 형제자매들에게 줄 선물로 기적의 메달을 구입하면서 기쁨을 함께 나눌 시간을 기대하였다.
바뇌에서 회개의 성모님, 기적의 메달 성당에서 은총의 성모님을 만나서 기쁘고 즐거웠다. 먼저 회개하고 은총을 받았으니 무엇에 비길 수 있으리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우리 성모님!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결정적 영향을 하고 조선 교구 설정과 초대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를 배출한 외방전교회 본부를 찾았다. 휴가철이라 신부님들이 없어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한국 교회사에 이름을 보탠 분들의 면면을 잠깐 볼 수 있었다.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과 내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든 곳이라 감회가 어느 곳보다 달랐다. 그러나 주인 없는 성당을 안내 없이 바라보기가 민망하고 허전하였다.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 여유가 생겨 버스로 시내를 돌면서 콩코드 광장,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 에펠탑을 구경하였다. 그 가운데 개선문은 짧은 시간이지만 도보로 한 바퀴 돌았고, 벽면에 새긴 조각들을 보고 정신을 잃을 뻔하였다. 또한 파리의 상징물 가운데 하나인 에펠탑을 먼 배경으로 보면서 기념사진을 쉼 없이 찍었다. 시내 구경을 마치고 루르드 행 기차 출발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세느강 유람선에 올라 파리의 풍경을 마음껏 구경한 뒤, 우리는 그리운 루르드를 향해 달렸다. - 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