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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성지를 찾아서 ⑥ - 성 유스티노 신학교
남부지방의 한국인 사제 양성 교육기관


취재|김선자(수산나) 기자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위치한 성 유스티노 신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성 유스티노 교정,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3호)는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대구대교구 사제 성소를 책임진 성소의 못자리로 일제강점기 때 폐교를 당하는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남부지방의 한국인 사제를 양성한 중요한 교육기관이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건립은 1911년 대구교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교구장 드망즈(Florian Demange, 한국명 : 안세화 安世華) 주교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 중의 하나였다.

드망즈 주교는 신학교 설립을 우선적으로 추진하며 1913년 9월 26일 프랑스 종교 잡지를 통해 프랑스인들에게 조선의 남부지방에 신학교를 세울 수 있게 도움을 호소했다.

“(생략) 우리 외국인 선교사들은 시초에만 필요합니다. 우리는 단지 준비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조선은 그 사제가 조선인일 때 진실로 그리고 마침내 가톨릭 나라가 될 것입니다. 오랜동안, 아마 매우 오랜동안 이 수천 만의 영혼을 그 그늘로 덮으려면 나무의 성장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오랜동안 살아남을 나무는 몇 년 사이에 성장하지 않습니다. (중략) 한 불쌍한 귀머거리가 사제관을 지어 내가 사는 작은 집을 떠날 수 있도록 자기의 저축금을 모두 내게 바치러 왔습니다. 나의 조선인들은 그들의 프랑스인 주교의 거처를 마련해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프랑스인들이여,  조선 신학생들의 거처를 마련해주십시오.”(대구대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 기초자료집 ⑭ 참조)

 


이러한 드망즈 주교의 요청에 세계의 각 지역에서 한국인 사제 양성을 위한 성금을 보내왔다. 그 가운데 중국 상하이에서 익명의 후원자가 유스티노 성인을 신학교의 주보로 모신다는 조건으로 2만 5천 프랑의 거액을 보내왔다. 드망즈 주교는 이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신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성 유스티노라는 신학교의 이름은 거액을 보내온 이 후원자의 뜻에 따라 정한 것이다.

조선 남부지방 신자들에 대한 드망즈 주교의 사랑과 헌신, 많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1914년 10월 1일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설립되며, 58명의 신입생이 입학했다. 제1회 입학생이었던 고(故) 이기수 몬시뇰은 신학교 생활 회고서를 통해 신학교 생활을 밝히고 있다.

“함께 입학했던 동기는 모두 58명이었는데 그 중에는  주교가 된 최덕홍 주교, 1984년에 선종한 박재수 신부, 일본인 프란치스코 야마구찌도 입학했다. 서울 용산신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던 대구대교구 첫 서품자 주재용 신부와 6명의 선배들도 유스티노 신학교로 전입해왔다. 동기생들의 연령층도 다양했는데 열다섯 살과 열여섯 살이 많아 열일곱 살이었던 나는 야마구찌, 박재수 신부와 나이가 많아 늙은 학생에 속했다.
마산에서 다녔던 성지학교와 같이 신학교도 말이 학교지 문교부의 허락도 없는 서당처럼 학생들을 모아 놓고 공부하는 식으로 지금의 신학교와는 천지차이였다. 학생들의 나이도 다양했지만 수준도 고르지 못해 한글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소신학교를 다녔던 나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이때 공부를 가르친 신부님은 단 두 분으로 으뜸 신부라 불렀던 교장 신부님과 당가(재정담당) 신부님이라 불렀던 관리국장 신부님이 모든 수업을 맡아서 하셨다. 우리는 수업을 포함해 일상생활을 라틴어로 해야 했고, 한국말을 하다 신부님께 들키면 그대로 성적에  반영되어 감점을 받았다.
학교 시설은 70여 명이 함께 자는 침실, 교실, 공부하는 복습소, 소지품, 옷을 두는 옷방이 있었는데 옷방에 용무가 있을 경우에는 관리국장 신부님한테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그 이유는 여자들이 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학교 식사는 대우가 좋은 편이어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고깃국을 먹은 기억이 있다. 입학 후 1년 동안 신학교 성당이 축성되지 않아 계산성당의 주일미사와 대축일 미사에 참례했는데 지금 계산문화관 앞은 그 당시 ‘버드나무골’로 불리었고, 시냇물이 흘렀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오면 계산성당 근처가 진흙탕이 되기 때문에 바지를 둥둥 걷고 다녀야 했다.”(대구대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 기초자료집 ⑭ 참조)



1918년 2월 23일 주재용 신학생(후에 제4대 교구장이 됨)이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첫 번째 사제로 서품되었고, 첫 입학생 58명 중 11명이 사제가 되어 교구 산하의 기관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1926년 9월 14일 성 유스티노 신학교 중등과에 입학한 고(故) 장병화 주교는 신학교를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 신학교 생활은 무척 힘들었다. 규칙도 엄했지만 한국말이 허용된 주일과 공휴일, 목요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라틴어로 해야 했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5시 30분 아침 기상 후, 바로 5시 45분부터 묵상 시간이었기 때문에 세수 할 시간은 15분밖에 되지 않았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세면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고 밖에 있는 우물에 가서 해야 했는데 겨울에는 얼음을 깨고 세수를 했다. 또 당시에는 죄수가 아니고는 젊은이들은 머리카락이 길었는데 신학생들은 반드시 ‘죄수’처럼 짧게 깎아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 당국에 건의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당했다. 우리 동기들은 사제품을 받고 신부가 된 후 머리를 길게 기르자고 다짐했고 신부가 되자마자 이를 실행에 옮겼다.”(대구대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 기초자료집 ⑭ 참조)

 

1930년대에 들어선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대신학과와 소신학과를 분리하여 신학생들에게 일반 교양과목을 가르쳤고 신학 교육의 질적 향상을 꾀했다. 이처럼 사제 양성 교육기관으로 성장한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1945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될 때까지 모두 67명의 사제를 배출했다.

1982년 3월 1일,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 받아 선목신학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관구 대신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고 1991년 6월 1일 성 유스티노 신학교 자리인 현재 위치로 이전했으며, 2000년 5월 9일 대구가톨릭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