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5일 주님 승천 대축일 : 마태 28,16-20
오영재(요셉) 신부, 효목성당 보좌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에 참례한 베드로는 복음 내용에 대해서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 여쭤보려고 찾아갔습니다.
베드로 : 신부님, 예수님의 제자는 열두 명이 아닌가요? 그런데 왜 오늘 복음에서는 열한 제자라고 나와요?
신부님 : 베드로야,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었잖니.
베드로 : 아, 맞다. 그랬지?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신 줄을 어떻게 알고 찾아갔을까요?
신부님 : 그거야 예수님께서 전에 말씀하셨잖아.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마태 26,32) 그리고 부활하신 직후에도 여인들에게 말씀하셨어.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요녀석아, 복음 좀 읽어봐라~!
베드로 : 아하, 그렇구나. 그런데 왜 하필 갈릴래아에요?
신부님 : 그건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신 장소도, 첫 제자들을 받아들이신 장소도 갈릴래아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갈릴래아에는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라고 불렸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잖아? 그러니 갈릴래아에서부터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지 않겠어?
베드로 : 음, 그렇군요. 그럼 우리도 이방인이에요?
신부님 : 유다인 말고는 모두 이방인이니까 한국 사람도 그들이 보기엔 이방인이지.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예수님을 몰랐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모든 이방인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란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지.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단다.
베드로 : 그렇구나…어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으면 이 세상에 안 계실텐데 어떻게 우리와 함께 계실 수가 있죠?
신부님 : 그러니 제자들에게 다 맡기시고 떠나신 것 아니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신 거야.
베드로 : 아하, 그런데 예수님께서 안 계신데 제자들끼리 어떻게 교회가 되요?
신부님 : 으이그.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열흘 있다가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내려오셨잖아. 성령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니 교회가 될 수 있는거야.
베드로 : 아, 그렇구나. 그럼 신부님도 교회에 속해 있어요?
신부님 : 신부님뿐만 아니라 베드로 너도 교회의 일원이란다.
베드로 : 저도요? 그럼 저도 신부님처럼 장가도 가지 말고 매일 미사 드려야 해요?
신부님 : 베드로야.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셨단다. 몸은 머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신부님은 신부님 자리에서, 베드로는 베드로의 자리에서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 되는 거야. 아이고, 베드로야. 이제 그만 가보렴.
베드로 : 예, 신부님. 안녕히 계세요.
오늘 제1독서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이야기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땅 위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언젠가 오실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며 오늘도 예수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아갑시다.
6월 12일 성령 강림 대축일 : 요한 20,19-23
김기환(미카엘) 신부, 동천성당 보좌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님! 당신의 은총으로 저희가 열매 맺게 하소서!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의 사랑으로 발하시는 성령(聖靈)이시여! 저희를 당신의 숨결로 감싸주심에 제 영혼이 감격에 춤추나이다. 두려움을 넘어선 흥겨운 발걸음은 평화를 분향(焚香)하며 당신께서 오신 그 기쁨의 밤으로 향합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 그날 밤에 헌 세상은 사라져 버리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밤은 새로운 창세(創世)의 때인 듯, 세상을 비추시는 샛별이 인간이 되어 오신 밤인 듯, 불멸(不滅)하는 새로운 빛을 품고 있나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아직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으셨기에 세상은 새로운 시작을 감지(感知)하지 못한 채, 스스로 갇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지척의 움직임도 들려올 듯, 두려움에 잠겨 숨죽여 숨어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만납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는 주님의 말씀은 나약한 인간의 울부짖음에 묻혀 들리지 않는 듯합니다.
나약한 인간의 영혼에 자비를 베푸시는 부활하신 성자께서 오시어 한 가운데 서시자, 드디어 새로운 광명(光明)이 인류를 비추며, 잠겨진 문을 열고 교회의 서장(序章)을 엽니다. 성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 자비이며, 평화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이끌리듯 제 영혼은 노래하고, 어린양의 만찬상을 꿈꾸듯 그립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인사 후에, 드러내신 구세주의 두 손과 옆구리에 드러난 실존(實存)의 표징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이겨낼 힘과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그분께서 우리 안에 그윽히 머무르시는 그 영성체의 환희 가득한 순간 같습니다.
위로자 성령님! 당신께서 돌보시지 않으시면, 저희는 단 한걸음도 내딛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저희를 파견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아, 성령님! 여전히 나약한 저희를 용서하소서.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드님의 길. 그 길은 부활의 기쁨과 영원한 생명을 향한 외로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수난의 길을 저희 힘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나이다. 그러나 당신께서 저희를 어여삐 여시기어 돌봐주신다면 그 충만한 위로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아드님께서 받으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그 잔을 저희도 함께 받쳐 들 수 있습니다.
강림(降臨)하시는 성령이시여! 당신께서 저희 안에 내주(內住)하시면 저희가 다른 이들의 죄를 용서할 힘과 용기를 얻고, 그들은 용서를 받나이다. 또 그대로 두면 남아있게 되나이다. 감사하나이다. 성령이시여! 당신께서 저희와 함께 계심에 저희는 진정 오롯이 다른 이들을 향한 존재(利他存在)가 되나이다. 당신께서 함께 하시니 저희의 용서가 자신을 향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향하게 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는 타협하지 않으며, 다른 이들에게는 화해와 용서로 일치하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으로 발하시는 성령이시여! 당신 은총으로 저희를 새로이 창조(創造)하소서! 당신의 위로로 다른 이들을 위한 성자의 파견(派遣)을 담대히 걸을 수 있는 열매를 맺게 하소서!
6월 19일 남북통일 기원미사 : 마태 18,19ㄴ-22
김동진(제멜로) 신부, 칠곡성당 보좌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예전에 새 번역 성경이 출판되고 난 후 한 신자가 저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새 번역 성경이 잘못 인쇄된 것 같습니다. 예전에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라고 적혀 있는데, 새 번역에서는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고 잘못 인쇄되었네요.”
그래서 제가 잘못 인쇄된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며,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 새 번역에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나오고 공동번역에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주어라고 나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면, 7×70=490번이 되는데 새 번역은 일흔일곱 번이니, 490-77=413. 이런 계산으로 보면 새 번역은 용서를 413번 적게 하라는 해석이 되고 맙니다. 이런 번역상의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희랍어의 숫자에 대한 표현이 모호해서 문법적으로는 일흔일곱 번 혹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둘 다 가능하기에 이런 혼동이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동번역의 일곱 번씩 일흔 번과 새 번역의 일흔일곱 번 둘 중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새 번역의 일흔일곱 번이라는 해석이 더 성서적 전통에 맞갖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 일흔일곱 번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대목이 있는데 그곳은 바로 창세기 4장입니다. 복수의 화신인 카인의 후손 중에 라멕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라멕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
카인의 후손, 즉 하느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법칙은 7배의 복수에서 갈수록 점점 더 심화되어, 77배의 완전한 복수의 형태를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완전한 복수는 완전한 용서로 변화하게 됩니다.
사실 용서라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타인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인간은 타인의 죄를 심판할 수도 없고 단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권한은 원래 하느님의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입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근래 남과 북 사이의 많은 문제와 사건으로 경색된 관계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첨예하고도 복잡한 정책문제와 군사문제, 가치판단은 일단 접어두고, 신앙인의 자세로 가장 먼저해야 할 것은 화해를 위한 기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죄와 심판과 용서는 원래 하느님의 것이기에 옳고 그름은 그분께서 판단해주시리라 믿으며, 우리 민족이 서로 화해하고 일치 할 수 있는 은총을 달라고 청해야겠습니다.
6월 26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요한 6,51-58
이동철(대건 안드레아) 신부, 인동성당 보좌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요한복음 6장은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 육체적 양식보다 영적인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리고 바로 당신께서 영원한 생명의 표본임을 가르쳐주시며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하느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살듯이,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성체성사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자께서는 오늘날에도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고 계십니다.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사랑의 정점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수난과 죽음을 겪으시며 당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그야말로 내어줌의 삶이었습니다. 이 내어줌의 사랑은 교회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의 전례에서 그대로 표현됩니다. 사제의 행위로 인해 빵과 포도주는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하게 되는 성체성사! 우리는 미사 때마다 이 사랑의 성사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받아모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의 여정에서 한 발 더 내딛습니다.
내어줌의 사랑을 받으며 영원한 생명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 우리들도 이 내어줌의 사랑을 세상에서 실천하여 더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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