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봄날의 아름다웠던 기억이 생생한데, 오늘은 종일 비가 내리고, mp3에선 ‘헤더 노바’의 ‘글루미 선데이’가 무겁게 흘러나온다. 자꾸만 비에 씻겨 내려가는 제주 올레길의 화려했던 영광을 서둘러 정리해본다.
제주의 내밀한 속살을 만져보고 단 내음을 맡아보려 선택한 것이 올레길 탐방이었다. 말괄량이 제주 날씨가 걱정스러워 바람막이 옷을 입고 운동화 끈을 묶는데 마음은 벌써 호텔을 나선다. 트위터를 통해 얻은 올레길에 대한 사전 정보로 마음은 길의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에 빠져 있는데, 기사 아저씨가 꿈을 깨는 이야기를 하시는 게 아닌가. 내용인즉,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올레길이 몸살을 앓고 있다는 거였다. 아뿔사,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낭패가 아닌가. 7코스 출발지인 ‘외돌개 주차장’으로 가는 내내 머리가 혼란스럽다. 잠시 후 택시는 주차장 진입도 어려운 형국으로 이어지고 대략난감. 하지만 어쩌겠는가. ‘간세다리(올레길을 알리는 천연식물합성수지로 만든 파란색의 제주조랑말 상징물 : 게으름뱅이라는 뜻)’를 마주한 고사목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는 서둘러 제주의 품안으로 뛰어 들었다.
 
‘외돌개’에서 설렘으로 길을 시작하니 다가오는 수려한 제주의 풍광은 우리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외돌개 주변의 자연미는 택시 안에서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주었고, 일행은 ‘미스 제주’앞에서 추억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돔베낭길’을 지나고 ‘법환포구’쯤에서 관광객은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비로소 제주는 내밀한 속살을 조금씩 허락하였다. 길옆 돌탑 위에 작은 소원을 하나 얹으니 성모님의 인디고블루 망토자락이 하늘에서 우리를 감싸주셨고, 쪽빛 제주 바다는 올레꾼의 마음 길을 한없이 열어주었다. 시나브로 걷자니 범섬은 곁에서 동무가 되고 인간의 집들이 사라지면 어김없이 드러나는 한라산은 그날의 보너스였다. 초록을 입은 웅장한 한라의 위엄은 절로 올레꾼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나도 모르게 콧노래로 주님을 찬미하게 만든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볼 때…, 저 수풀 속 산길을 홀로 가며 아름다운 새소리 들을 때….’ 언제부턴지 라일락 향기를 닮은 귤꽃 향기가 바람에 섞여 날아들자, 우리들은 한 마리 나비가 되고 벌이 되어 기쁨의 환성을 주님께 올렸다.
외돌개에서부터 강정천에서 헤어질 때까지 발치에서 길벗이 되어주었던 형형색색의 수많은 들꽂들, 어린 제주의 모습을 수줍게 간직하고 있는 해안 용암지대, 현무암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소나무의 푸르른 내공, 짠 바닷물과 공존하는 용천수의 기묘한 공생, 쉼 없이 불어오는 자유의 바람, 예고도 없이 발밑에서 갑자기 끊어지는 절벽 등 길은 여러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고 맞아주었다.
쉼터에서 맺힌 이마의 땀을 닦고 한 잔의 커피로 피로를 식히고 있자니 행복에 겨워하는 일행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길 위에서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자연에 동화된 일행의 얼굴들은 미소로 환히 빛나고 있었다. 길을 통해 변화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한 건 올레가 준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올레길은 마법의 성이었다. 거기서 마음껏 뛰놀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 내 안의 아이를 보았으니 말이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며, 제주 올레길은 끝났으나 인생의 올레길은 진행 중이다.
함께 길을 걸었고 앞으로도 같은 길을 걸어야 할 사무직원 한 분 한 분, 길라잡이가 되어준 복자성당 사무원 황경순 베로니카 님, 뒤에서 보호자가 되어주신 진량성당 사무장 성용운 루치아노 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우리에게 올레길을 선물해주신 하성호 사도요한 지도 신부님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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