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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7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오영재, 김기환, 김동진, 이동철 신부

7월 3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 마태 10,17-22
오영재(요셉) 신부, 효목성당 보좌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찬미예수님! 유난히 무더운 올 여름을 잘 이겨내고 계십니까? 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입니다. 하느님께서 대구대교구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구교구에 큰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아울러 저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대구교구 신자들에게 축복을 전하고 힘을 북돋아주라고 하셔서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하느님께서 대구대교구와 한국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한국 교회가 선교사들의 전교가 아니라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큰 축복입니다. 1784년에 이승훈 선생이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후, 주문모 신부님을 비롯하여 몇몇 신부님들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지요. 그중 한 분이신 모방 신부님은 조선인 사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셔서 저를 비롯하여 두 명의 신학생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셨습니다. 당시에 저의 나이는 열다섯이었습니다. 비록 어린 나이었지만 사제직을 향한 결심은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저의 증조부이신 김진후 비오께서 을해박해 때에 순교하셨고, 무엇보다 태어나면서부터 저를 길러 주신 양친의 신앙을 보며 자라났기 때문이죠.  

저는 최양업과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갔습니다. 우리 세 명의 조선인 신학생은 비록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형제보다 더 진한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타향살이를 하며 의지할 곳 없어 외로울 때에는 서로가 힘이 되어 주었지요. 그러던 중 1838년에 최방제 형제가 열병으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느님의 그 크신 뜻을 어찌 인간으로서 이해하겠습니까만 그 순간만큼은 형제를 먼저 데려가신 하느님이 야속했습니다.

저의 고통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하고 있던 중에 부친이신 김제준 이냐시오께서 박해로 1839년 순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멀리 떨어진 외국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너무나 한스러웠습니다. 특히 모친께서 문전걸식을 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웠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고국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머니의 신앙이 저보다 훨씬 두텁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믿으며 어머니께서는 굳세게 살아가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간다면 어머니 가슴에 더 큰 못을 박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하루 빨리 성직자가 되어 고국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다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후로 기회가 닿는 대로 몇 차례 입국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던 중 1844년에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초에 마침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치게 그리운 어머니를 만나 뵙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사명을 띠고 왔기에 사적인 용무에 집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몇 달간 사목을 하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이 절실히 요구되어 다시 몇몇 신자들과 함께 상해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손으로 만든 배는 바다를 항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과연 바다는 무섭게 우리를 덮쳤고, 우리는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성모님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성모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리라 굳게 믿고, 신자들을 격려했습니다. 성모님의 보호로 폭풍우 속에서 마침내 우리는 중국 배를 만나, 그 배의 인도로 중국에 도착했습니다.

1845년 8월 17일 저는 마침내 상해 근처의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은 한국인 첫 사제라는 자랑스러움보다 어서 빨리 고국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불타올랐습니다. 그래서 페레올 주교님과 함께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딴 배를 타고 상해를 출발했습니다. 우리는 죽을 뻔한 고비를 수차례 넘긴 후에 잠시 제주도에 표착했다가, 마침내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잠시 국내 정세를 살핀 후에 어머니와 동생이 살고 있다는 경기도의 은이공소에 찾아갔습니다. 다시 만난 어머니의 고운 얼굴은 몇 년 사이 주름이 덮였지만, 신앙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 힘든 과정을 겪고 돌아온 아들 신부의 쏟아지는 눈물을 그분은 거친 손으로 닦아 주셨지요. 저는 살아 있는 동안 어머니께 효도하리라 굳게 다짐하며, 얼마간 은이공소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주교님께서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한 해로를 개척하라 하셨기에, 저는 백령도로 가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였습니다. 하지만 순위도에서 정체가 드러나 마침내 포졸들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저는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비천한 재주를 나라에서 좋게 보았는지, 배교를 고백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고 벼슬까지 주신다고 하더이다. 그 순간 솔직히 갈등했었습니다. 고문과 죽음이 두려웠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벼슬아치가 되어 백성의 지도자들부터 하나씩 복음을 전파해 나간다면 박해도 막을 수 있고, 보다 쉽게 전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러나 곧 복음구절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제 한 목숨 부지해서 전교한다 해도 겨우 한 목숨 값어치밖에 얻지 못하지만, 제가 죽어서 흘린 피 위에 수많은 낟알이 영근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최양업을 비롯하여 많은 후배 사제들이 이 땅 위에 복음을 전할 것인데, 첫 사제로서 제가 가야 할 길은 바로 “순교”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후손들에게 전했고 그것이 성경과 성사를 통해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그런 전통 없이 온전히 믿음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였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그 믿음을 위해 저를 비롯하여 수많은 선조들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하느님께 훨씬 더 값지고 복된 상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우리의 후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다른 민족들보다도 훨씬 더 진리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들과 수많은 순교자들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힘을 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멘.
2011년 7월 3일 하늘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드림.

 

 

 

7월 10일 연중 제15주일 : 마태 13,1-23 또는 13,1-9
김기환(미카엘) 신부, 동천성당 보좌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하늘 나라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누구입니까?(마태 13,1-23)

사랑하는 주님, 그날의 호반(湖畔)에 저희를 초대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배에 오르시자 그곳은, 땅과 갈려진 물과 같이, 그러나 결코 물이 아닌 땅과 같은 신비롭고도 새로운 장소가 되었나이다. 그곳에서 말씀하신 당신의 비유는 명경(明鏡)이 되어 저희 영혼을 비추시나이다. 그 모습에는 지상에서 천상을 향하는 당신의 교회와 그 안에 맡겨진 당신 말씀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께서 하신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였습니다. 허락된 이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뜻은 이러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씨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그 엄위(嚴威)와 영화로움은 이 땅의 말로는 완전히 드러낼 수 없고, 겨우 씨앗 만하게 담아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씨앗! 하늘 나라를 드러내는데, 이보다 더 좋은 비유가 있을까요? 씨앗에는 생명이 담겨 있고, 그 겉모양만을 보는 이들은 나무의 크기와 모양, 열매가 얼마나 달릴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씨앗의 소중함을 평생 알고 일구며 살아간 이들은 그 씨앗만을 보고서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일지, 얼마나 건장(健壯)할 지, 얼마나 달콤한 열매를 내는지 알 수 있으니 진정 씨앗은 하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탁월하게 비유합니다.

그 하늘 나라의 씨앗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던 바로 그 자리, 그 시간에서부터 여기 저희가 발 붙인 자리, 숨쉬는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영롱(玲瓏)히 울려듦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를 끝없이 사랑하시기에 한없이 불러주시는 당신 사랑의 목소리에 제 영혼은 생기가 돋나이다. 또한 한편 때로는 어리석어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저희의 부족함에 아파하실 당신의 성심을 겸손되이 위로하고 경배하며 이 기도를 계속 바칩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는 부족한 입술로 당신께 여쭙습니다. 그 씨앗은 주님 당신께서 직접 선종(選種)하신 보배입니다. 결국 그 씨앗이 뿌려질 땅의 걸고 기름진 정도(肥沃度)에 그 열매가 좌우됩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하늘 나라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아! 저희 마음의 눈과 귀를 열어 하늘 나라를 보게 하시고 말씀을 듣게 이끌어주시는 주님! 좋은 땅의 열쇠는 ‘행복’이었습니다. 저희에게 행복을 다시금 일깨워주심에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행복을 다시 한 번 저희 영혼이 노래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2-12)

주님. 가난하고, 슬프고, 또한 온유하다 못해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 뵈옵기를 간절히 바라며 평화를 이루고 의로움에 박해를 받는 이들, 그들이 바로 좋은 땅이었습니다.

사제(司祭)요, 제대(祭臺)이며, 어린양이신 주님. 저희를 당신의 겸손으로 이끄소서. 참됨(眞)과 선함(善)과 아름다움(美)이 있는 하늘 나라의 땅으로 찾아들게 하소서. 그 땅에는 욕심과 이기심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자득(自得)과 자기만족이 창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은 사제의 가난과 온유한 의로움이 망울지고, 제대의 자비와 청정함이 영글며, 어린양의 평화와 희생이 꽃피는 곳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깨닫게 하소서. 새기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을 본받아 좋은 땅이 되어 하늘 나라의 열매를 백배 맺게 하소서.

 

 

 

7월 17일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 마태 13,24-43 또는 마태 13,24-30
김동진(제멜로) 신부, 칠곡성당 보좌


24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농민주일에 맞춰서, 농부를 생각하게 하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말씀입니다. 농부가 밭에 분명히 밀을 뿌렸는데, 원수가 농부가 자는 동안에 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고, 종들이 그것을 발견하고 뽑아내려고 하자 집주인인 농부가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가라지와 밀은 다 자라 열매를 맺지 않는 한 농부들도 구별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비슷한 가라지와 밀이 함께 밭에서 자라난다고 하니 구약성서의 나필족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창세기 6장을 살펴보면, 카인과 아벨 이야기와 노아의 방주 사이에 ‘하느님의 아들들과 거인족’이라는 제목이 붙은 부분이 있습니다. 흘려 읽기 쉬운 부분인데, 그 전반적인 내용은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하여 그 사이에 거인족, 나필족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견해가 있지만, 그 중의 한 견해는 이 부분이 노아와 심판이야기에서 심판의 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어우러지게 되어서 나필족이라는 거인족이 생겼고, 이들은 완전한 하느님의 아들도 아니고 완전한 사람의 딸들도 아니니 그들의 어중간한 위치가 심판을 불러왔다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고 의미가 있는 해석입니다. 이런 해석을 현대의 교회의 상황에 빗대어 본다면, 오늘날의 하느님의 아들들인 신자들이 오늘날의 사람의 딸들인 비신자들과 적당히 섞여서 타협하고 살아간다면 그럴 때 심판이 오게 될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섞여서 살고, 적당히 타협하는 모습은 묵시록에도 제시되는데, 요한은 환시 중에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경고하는 주님의 목소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

적당히 타협하고 신자의 겉모습만 유지하는 사람들은 언뜻 보기에 구별이 가지 않는 가라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러한 가라지와 같은 이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 주간 살아가면서 늘 내가 가라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현대의 나필족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면서 좋은 알곡을 맺는 밀과 같은 신자들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7월 24일 연중 제17주일 : 마태 13,44-52 또는 13,44-46
이동철(대건 안드레아) 신부, 인동성당 보좌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예수님께서는 이번 달에 계속해서 비유를 통해 하늘 나라의 모습들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비유를 따라가 보도록 합시다.

 

밭에 숨겨진 보물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이고 우리들은 보물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구약과 신약성경에 걸쳐 이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애썼습니다. 멜키체덱은 그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 예물을 바쳤고 니코데모는 그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삶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노력으로 하늘 나라라는 보물을 얻었습니다. 하늘 나라는 그렇게 하늘 나라의 가치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보물입니다.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
하늘 나라는 상인이고 우리들은 진주입니다. 상인은 언제나 좋은 진주를 찾아다닙니다. 그는 자나 깨나 좋은 진주에 대한 생각뿐입니다. 이처럼 하늘 나라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
하늘 나라라는 행복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여들고 하늘 나라에서는 그들을 모아들입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고 모두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 나라는 그 가치에 맞는 삶을 살았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에 따라 들어갈 수도 있고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는 곳입니다.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옛 것도 꺼내는 율법학자
앞의 세 비유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두에게 하늘 나라는 열려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고 모든 사람 곁에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늘 나라의 가치인 사랑을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우리의 삶을 바쳐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우리는 하늘 나라의 가치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위한 행위는 수학처럼 언제나 같은 상황에서 같은 답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에 맞는 행위를 하기 위해 성경을 중심으로 한 공부도 해야 하고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돌아보고 그 삶을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옛 삶에서 좋은 행위는 계속해서 해 나가고 또한 새로운 삶에서 다가오는 기회에서 새로운 사랑의 실천을 해 나가야 합니다. 이처럼 하늘 나라는 언제나 우리 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라는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하늘 나라의 가치인 사랑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7월 31일 연중 제18주일 : 마태 14,13-21
김기환(미카엘) 신부, 동천성당 보좌
 

13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오천 명을 먹이시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천 명을 먹이신 주님의 기적(奇迹)을 여러분과 나눌 수 있게 되어 큰 기쁨으로 생각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기적은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적은 없다.’라고 말할 때에, 마치 우리에게 기적을 바라지 말고 자신의 노력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뜻으로 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노력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자립심을 고취시키는 취지로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무능력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노력과 자립심, 이성과 자유는 충분히 가치가 있으며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기적이 없다.’라는 말이 착각인 이유는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과 누리는 자유와 사유하는 이성이 모두 하느님의 선물이며, 그 하나가 모두 기적과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느님의 손의 연장으로서 세상을 가꾸어 나가면 나갈수록, 이 세상을 기적으로 점점 채워나가는 것이 됩니다. 진정 모든 것이 기적이 됩니다.

이제, 우리 주님의 기적을 되새겨보고, 그 진의를 묵상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외딴 곳으로 물러 가셨지만, 여러 고을에서 그분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군중은 그분을 따라나섭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병자들도 있고, 허기지고, 가난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저녁 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군중을 돌려보내자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낼 필요가 없으며, 제자들이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우는 소리를 늘어놓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라 하시고, 군중들은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기적이 일어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저는 여기서 감히 이 기적을 설명하고 증명해보고자 합니다. 이 기적을 설명하기 위한 좋은 예가 있습니다. 바로 환율(換率)입니다. 각각의 나라마다 화폐가 있고, 나라의 국력에 따라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갈 때 돈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만 원이면 가장 비싼 커피숍에서 도넛과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돈이지만, 아프리카를 비롯한 극빈국에서는 설사로 죽어가는 어린이 10명의 생명을 살리는 링거액을 투여하거나, 50명의 어린이에게 소아마비 또는 홍역 예방접종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시력 상실과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비타민 A캡슐을 800개 구입하거나, 5리터의 물을 정화할 수 있는 수질정화제를 700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작은 가치가 다른 나라에 가서 저렇게 큰 가치가 되듯, 이 땅의 가치도 그 나라의 부유함의 정도에 따라 이렇게 서로 천차만별이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구세주의 손에 직접 들려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진, 이젠 하늘 나라의 소유가 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가치는 이 땅에서 얼마나 될까요? 하늘 나라의 부유함이 이 땅에 내려온다면, 얼마나 더 풍성해지겠습니까? 분명합니다. 그 고귀한 가치는 과연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남을 만큼 가득 차고, 넘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시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땅의 되로 재어주지 마십시오. 이 땅의 말이나 섬으로 내어주지 마십시오. 한 움큼의 사랑이라도 하느님께 바친 감사의 제물로 서로 내어주십시오.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처럼 건네주십시오. 주님의 성심을 바라보는 깊은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봐주십시오. 그 때, 우리는 하늘 나라의 가치를 이 땅에 실현시키는 기적을 행하게 됩니다. 모든 일이 하느님 손 안의 기적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