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 한티순교성지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해발 600미터의 깊은 산중턱 고갯길에 자리잡고 있다. 서쪽 가산(901미터)과 남동쪽 팔공산(1,192미터) 사이에 위치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모여 신자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신자촌 형상
대구에서 군위, 의성으로 넘어가는 큰 산 고개, 한티 아래에 형성된 산골마을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피난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신자촌이 언제 형성됐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경기도, 충청도 지역의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경상도 땅으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추측하고 있다. 또한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때 경상 감영에 투옥된 가족과 친지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대구 인근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추정한다.
처음에는 한두 집이 모여 움막을 짓고 사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하던 정도였으나 서울에서 낙향하여 신나무골에 살던 김현상(요아킴) 가정이 기해박해 때 피난을 온 뒤로 인근의 사람들이 입교하여 점점 신자수가 늘어났고, 1850년대에는 큰 신자촌으로 발전했다. 또한 이 시기에 날뫼에 살던 이 공사가 알로이시오 가정이 이주해왔다.
박해가 잠잠해지자 경신박해로 떠났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어 전보다 더 큰 신자촌으로 성장했다. 1850년대 순방을 다녔던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선종한 후 경상도 지역의 사목을 맡게 된 다블뤼 주교는 성무집행보고서를 통해 40여 명이 성사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김현상 가정이 떠난 후 상주 구두실이 고향인 조 가롤로 가정이 한티의 중심이 되어 주일을 지냈다. 김현상 후손들이 대구 읍내 첫 신자 가정 중의 하나가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초창기 대구 교회 창설에 큰 공로를 세웠다.
박해와 순교
경신박해 때 신나무골에서 한티 사기굴로 피신 온 배손이 가정이 잡혀 배손이는 배교했고, 아내 이선이(엘리사벳)와 장남 배도령(스테파노)은 작두날에 목이 잘려 순교했다. 현재 이선이의 무덤은 신나무골성지에 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신자 8,000명 이상이 순교했다. 이때 문경 한실의 신자촌으로 피난 간 서태순 가정은 그해 가을 포졸에게 잡혀 문경 아문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세 차례의 심문과 문초를 받고 44세인 1867년 1월 13일 혹은 24일 목 졸려 치명했다.
한티에 살던 이 공사가 알로이시오는 거꾸로 대구 읍내로 피신하였다가 무진년(1868년) 다시 동쪽(하양 방향)으로 피신하였으나 고발되어 감옥에 갇혔다. 문초를 받았으면서도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31세로 서태순의 형 서인순(시몬)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목 졸려 순교했다.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발생한 이후 박해는 선참후계(先斬後啓)령이 시행되며 더욱 격화되었다. 1870년경 봄 한티에 포졸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을 체포하는 한편 공소회장 조 가롤로와 아내 최 바르바라, 동생 조 아기를 그 자리에서 죽였고, 배교한 이들은 풀어주고 도망가는 신자들은 끝까지 추격하여 죽였다.
한티공소의 재건
살아남은 신자들이 한티에 돌아와 보니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온 산 곳곳에 널린 시신은 심하게 부패하여 옮길 수 없어 그 자리인 밭, 산등성이 등에 매장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공소회장이었던 조 가롤로와 아내 최 바르바라, 동생 조 아기의 시신은 그들이 쓰던 묵주, 십자가와 함께 사기굴 바로 앞에 있던 그들의 밭에 나란히 묻었다. 하지만 이들 외에는 이름을 확인할 수 없었다.
신자들은 조 가롤로의 어린 아들 조영학(당시 11세)을 공소회장으로 추대하고 함께 마을 재건에 힘썼다. 순교자들이 살던 마을(순교자묘역 대형 십자가 뒤 십자가의 길)은 ‘하느님을 증거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피가 서린 거룩한 곳이므로 우리 같은 죄인이 밟을 수 없다.’하여, 순교자들이 살던 곳보다 바람이 세고 추운 곳에 마을을 만들었다. 이곳이 현재의 재현된 초가집들이 있는 자리이다. 이후 이들은 순교자의 묘를 돌보았다.
1882~1883년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한티에서 성사를 집행했다. 이때 신자는 39명으로 고해성사를 본 이가 20명, 영성체자 19명, 세례자 3명, 혼배성사를 본 이가 한 쌍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85년 신나무골에 대구 본당이 설정된 후 로베르 신부는 자주 한티공소를 방문했고 신자들은 대축일이면 미사 참례를 위해 신나무골로 갔다. 이후 번창한 한티공소는 1900년 초 신자가 80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나 전교 등 편리한 생활을 위해 떠나면서 공소는 쇠퇴하게 되었다.
37기 순교자의 묘가 있는 거룩한 땅 한티순교성지
1967년 9월 대구대교구 평신도 액션 단체들이 이틀에 걸쳐 신나무골에서 한티까지 도보성지순례를 함으로써 한티순교성지 개발이 시작되어, 1983년 당시 보좌주교였던 이문희(바울로) 주교가 매월 마지막 주일에 순교자 현양미사를 봉헌했다.
1983년 9월부터 묘소 확인 및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고 이곳에 살던 이들의 후손이나 친척 등을 통해 순교자들의 묘를 확인했다. 1988년 몇 기의 무덤을 발굴해 본 결과 순교가 틀림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현재 37기의 묘소 중 3기는 조 가롤로, 최 바르바라, 조 아기의 묘이고 나머지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로 1988년 6월 묘소 확인 및 발굴 작업이 완료됐다.
2000년 2월 17일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생들이 영성의 해를 보낼 수 있도록 건립된 한티 영성관 봉헌식을 가졌고, 2004년 12월 10일에 순례자의 집이 건립됐다.
제2차 시복을 준비 중인 서태순 베드로와 이 공사가 알로이시오
현재 순교자 124위와 증거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시복·시성을 사도좌에 청원한 상태이다. 이들 중 대구대교구 순교자는 20위이다. 이분들 외에도 전국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제2차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제2차 시복을 준비 중인 분들 가운데에는 대구대교구 순교자 서태순 베드로와 이 공사가 알로이시오가 포함되어 있다. 이분들이 복자위에 오를 수 있도록 교구민들의 기도가 필요하다.

한티순교성지 그리고 한티피정의 집
한티는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신앙을 간직하던 역사의 땅이며 병인박해(1868년) 때 죽음으로 하느님을 증거한 조 가롤로와 40여 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묘가 있는 거룩한 순교성지로 1991년 10월 20일 개관한 한티피정의 집과 순례객을 위한 순례자성당이 있다.
김종헌(발다살) 관장 신부는 “한티순교성지를 찾는 순례객 중 우리 교구 순례객의 수가 적은 편”이라며 “매주일 대구대교구에서 800여 명의 순례객이 다녀가는데 그 수가 1년이면 7천 명 정도로 그중 3,500명이 예비신자”라고 밝혔다.
 
대구대교구 신자들의 한티순교성지 방문을 권장하는 김종헌 관장 신부는 “깊은 역사에 비해 박물관 등 시설이 미비하지만 한티순교성지는 우리 대구대교구의 신앙선조들이 지킨 신앙의 역사를 한 눈에 느낄 수 있는 장소”라며 “멀리 성지순례를 가는 것도 좋지만 그러기에 앞서 한티순교성지를 먼저 순례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고 말했다. 이어 “신자들 중에는 아직까지 한티순교성지를 순례해 보지 못한 분들도 많다.”고 덧붙였다.
본당 및 단체 피정을 위한 시설대여, 위탁피정과 2011년 2월부터 개인, 소단체, 가족 등 소단위 피정객을 받고 있는 한티피정의 집은 대성당, 소성당, 120석의 대강의실, 40석의 소강의실, 다용도로 사용 가능한 친교실 및 10여 개의 소그룹 회합실, 욕실이 완비된 65개의 남향 침실 등 완벽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한 한티 곳곳에 기도와 묵상을 위한 공간과 아름다운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피정을 위한 최적의 장소이다.
전례음악 연수와 전광진(엘마노) 신부의 신앙강좌로 많은 호응을 얻었다는 김종헌 관장 신부는 “8월 8일(월)에는 이한택(요셉) 주교님의 이냐시오 영성 특강이 있는데, 이한택 주교님께서 1년에 몇 차례 특강을 해 주실 수 있다고 하셨다.”면서 “가족피정, 음악피정, 효소단식피정 등을 정기적으로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티순교성지를 찾는 순례객을 위한 편의시설이 부족하다고 밝힌 김종헌 관장 신부는 “피정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면 피정의 집은 개방할 수 없어 순례객이 화장실 이용의 불편을 겪고 있다.”며 “순례자성당 옆에 화장실이 있지만 그 수가 부족하여 늘릴 계획을 갖고 있지만 3천 5백만 원이나 드는 비용 때문에 엄두도 못내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어서 “순례객이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그늘막 공간인 정자와 간단히 요기를 할 수 있는 편의점이 필요하지만 여건상 힘들다.”며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재 한티순교성지에는 순례자성당 앞 14개의 벤치와 독지가의 도움으로 연못에 비단잉어를 넣고 그 옆에 평상 3개를 설치한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또한 초가 공소에는 쉬면서 차를 마실 수 있는 조그만 차방이 마련되어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초창기 3,500명의 후원회원 중 현재 350여 명의 후원회원이 활동하고 있다는 김종헌 관장 신부는 “한티순교성지에 많은 관심과 봉사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한다.”며 “한티순교성지를 비롯하여 우리 교구의 많은 성지를 아끼고 순례해달라.”고 당부했다.
* 한티순교성지 후원·한티피정의 집 피정·순례 문의 : 054)975-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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