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4일 연중 제23주일 마태 18,15-20
오영재(요셉) 신부, 효목성당 보좌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가까운 사람이 나에게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하여 똑같은 주제에 다른 결론을 내놓으십니다. 마태오복음 18장 15절에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이어지는 2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타이름과 용서…. 조금 비약시킨다면 꾸짖음과 포용으로 바꿔볼 수 있겠습니다. 한 쪽은 잘못을 바로잡는 것 그리고 다른 한 쪽은 그 잘못을 덮어두고 수용하는 것, 과연 어느 쪽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정답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답은 “상황마다 다르다.”입니다. 두 가지 이야기의 상황을 비교해 봅시다. 일단 마태오복음 18장 21절 이하의 이야기는 개인적인 분위기가 짙습니다. 형제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만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피해를 입은 ‘나’만 용서하면 됩니다. 여기서는 나와 그 형제 이외의 사람들이 배제됩니다. 그런데 15절 이하의 이야기는 보다 공동체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나’와 그 ‘형제’ 이외에 ‘한, 두 사람’과 ‘교회’까지 등장합니다. 즉 여기에 나오는 ‘형제’는 ‘나’뿐 아니라 ‘교회’라는 공동체 전체에 피해를 입힌 사람입니다.
공동체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볼까요? 공동체(共同體)는 글자 그대로 여러 사람이 함께 하나의 몸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두 가지 원리는 바로 연대성의 원리와 보조성의 원리이죠. 군대에서는 부대원 가운데 한 사람이 잘못을 하면 그 부대 전체가 책임을 지는 연대책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손가락을 깨물면 온 몸에서 통증을 느끼듯이, 연대성의 원리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서로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보조성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열한 명의 선수가 축구를 하다가 한 명이 퇴장을 당했습니다. 남은 열 명의 선수는 퇴장당한 선수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 포지션을 다시 조정하고 더 열심히 뛰어야겠죠? 비록 한 명이 빠졌지만 남은 열 명의 선수들이 더 분발해서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훌륭한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일까요? 서로 넘어지길 기다렸다가 마침내 누군가 넘어지면 그 위를 밟고 서서 위로 올라가는, 그런 공동체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상적인 공동체는 바로 ‘교회’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1서 12장에서 교회의 공동체성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보조성의 원리)…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연대성의 원리)…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그 지체들입니다. 그 지체 가운데 하나가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태오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하지만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지체를 버리고 불구로 사시길 원하실까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 전체를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지체를 잘라버리는 것은 정말 최후의 수단인 것이죠. 그러므로 형제를 타이를 때에는 언제나 제2독서의 원칙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오늘 복음은 죄를 지은 형제를 잘라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개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삼진 아웃의 스토리는 그 형제를 아웃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포볼로 내보내기 위한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핵심이자 예수님의 진심이 담겨있는 부분은 첫 번째 구절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9월 11일 연중 제24주일 : 마태 18,21-35
김기환(미카엘) 신부, 동천성당 보좌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세상에 당신 자비의 증거가 되고, 이 삶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왕이신 주님이시여!
자비로운 왕께 만 탈렌트를 탕감(蕩減) 받았지만, 동료에게 꿔준 백 데나리온을 포기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종의 모습에서 저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느님 당신께 용서 받으면서도,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저희의 이기적인 모습이 거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용서를 체험하면서도 용서를 실천하기란 여전히 어렵습니다. 주님! 저희는 이렇게 당신과 멀어져야 합니까?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저희 속에서 이기심을 몰아내고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창조주시여! 용서하시는 주님이시여! 위로자시여!
사랑이신 당신에게서 창조되었고, 당신의 구원을 바라며, 당신의 위로를 누리면서도 저희는 어찌 이리도 이기적(利己的)인지요. 저희의 이기심은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어둡고 깊어, 당신을 안다는 신앙인이라 자처하면서도 여전히 이기적입니다. 주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손길을 체험한다면 이 이기심을 벗어버릴 수 있으리라 여겼던 기대는 어리석은 종의 모습에 겹쳐진 저희 자신의 얼굴과 함께 흩어져 버렸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당신과 함께 살며, 가르침을 직접 듣는 제자도 용서의 횟수를 우문(愚問)하는데, 여기 저희는 어리석음의 깊이가 까마득하여 서글퍼집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착잡(錯雜)한 저희 마음이 당신의 이 말씀에서 다시금 희망을 찾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일곱 번 아니라, 일흔일곱 번 어리석더라도 다시금 일깨워 주시려는 사랑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기심을 벗어버리지 못해 어려워 하며 흔들리는 저희를 하느님의 자녀로 이끌어 주십시오. 이 서글픔을 채워 기쁨으로 춤추게 하십시오. 고백하오니, 저희의 영혼은 아직 어리고 연약하나이다. 당신의 손길을 한 번 또 한 번, 끊임없이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소서. 이기심을 벗어버리는데 그치지 말게 하시어, 다른 이들을 위한 존재(利他存在)가 되게 하소서. 내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고 원수를 사랑하는 이가 되게 하소서.
용서하시는 주님이시여!
당신의 용서를 체험하며 만족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 영혼을 더욱 부추기소서. 용서하시는 당신 자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숙고하고 내면에서 끊임없이 되새김(反芻)하여 그를 실천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하느님을 사랑하려, 이웃을 사랑하려 실제로 노력하는 이로 이끌어주소서.
주님! 부족한 입술로 한 가지 간청을 더 드리오니, 끝없이 용서하게 하소서. 이 용서가 당신으로 향하는 길의 완성이라 할지라도, 길 가는 도중에서부터 실천하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나이다. 당신의 자비를 입은 은총의 사람이란 것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함이나이다. 남들에게 연탄재가 되고, 사랑하다가 죽으리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세상에 당신 자비의 증거가 되고, 이 삶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9월 18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이동, 연중 제25주일 : 루카 9,23-26
사공병도(베드로) 신부, 새 사제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
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우리는 지금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이 길은 다름 아닌 엠마오로 향하는 길입니다. 그 언젠가 상심한 채 고향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두 제자들을 뜨겁게 만든 바로 그 길 위에 우리는 와 있습니다. 그날의 두 제자들에게 그리하셨듯이 그분께서는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와 동행해주십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찬란한 영광이 “당신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과 함께 서서히 저 산 너머로 저물어갑니다. 그러자 이내 수난과 죽음이라는 이름의 암담함이 온 누리를 덮쳐옵니다. 그리고 이를 따라 부활이라는 이름의 달이 떠올라 희미한 희망으로 하늘에서 빛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 줄기 달빛에 의지한 채 캄캄한 숲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조심스레 첫 발을 내딛어봅니다. 그 순간 “모든 사람”이라는 말씀이 발길에 채입니다. 당시 그 자리엔 홀로 기도하시던 당신과 그 옆을 지키고 있던 제자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라니요! 그분께서는 과연 누구를 향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혹시 이는 그분께서 시공을 넘어 우리에게 건네시는 초대는 아닐까요? 그분의 눈과 입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를 향해 있다는 느낌에 가슴이 설레어옵니다.
다시 한 걸음 내딛고 나니 저기에 이 길의 이름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입니다. 이 길의 이름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입니다. 이 이름은 캄캄한 앞길에 흔들리는 우리의 눈동자를 저 하늘로 고정시켜줍니다. 그 하늘에는 비록 희미하지만 충분히 기대어볼 만한 부활의 빛이 달이 되어 떠 있습니다. 또 그 하늘은 기적이라는 찬란한 영광이 빛을 발했던 그곳입니다. 분명 이 캄캄한 길을 간다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지만 이 길이 빛이신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면 분명 그 끝이 저 하늘에 닿아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기에 다시금 우리는 깊은 들숨과 함께 용기 내어봅니다.
단숨에 성큼 내딛은 한 걸음, 갑자기 “제 십자가”라는 돌부리가 순간 우리를 움츠리게 만듭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죽음으로 직결되는 고대의 사형도구이며 어리석음의 대명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고가야 할 것은 아무 십자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따르려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는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이루고자 했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나 자신의 십자가는 (그것이 고통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나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실 아버지의 뜻이 아닐까요?
그런데 다음 걸음을 내딛으려는 찰나에 자신의 십자가를 그냥 짊어져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우리 발길을 붙잡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지어야 한답니다. 그냥 살기에도 벅찬 우리이기에 무겁고 짐처럼 여겨지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만도 무리인데…. 또다시 무언가를 요구하는 비정한 이 길이 무척이나 얄밉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가만히 돌이켜보면 지금 우리가 느끼는 이 버거움은 아버지의 뜻인 “제 십자가”가 무거워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다가 내 뜻까지 함께 짊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을 따라 하늘로 가는 이 길에서 내 뜻을 버린다면 아버지의 뜻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짐으로 다가오지 않겠지요.
이제 한 걸음 더 앞을 향해 내딛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이라는 말씀이 발길에 닿습니다. 당신 말씀대로라면 이 길을 끝까지 갈 때 자신을 잃거나 해치지 않게 된다는 것인데, 우리는 이 길을 가기 위해 이미 자신을 버려야 했습니다. 과연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요? 사실 우리는 나를 버리는 것이 나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또 나의 뜻을 버리는 것은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금 내가 포기하고 있는 자신이 참된 나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참된 나를 지으신 아버지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길은 우리를 하늘로 올려다줄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태초에 지으신 모습 그대로의 참된 나를 되찾아주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다시금 걸음을 내딛어봅니다. 그리고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이라는 말씀과 마주합니다. 인간이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에덴동산에서였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진 인간은 내가 바라보는 기준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지어진 자신이 부끄러워 몸을 숨겼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감추기 위해 이것저것으로 치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거짓 자아는 바로 여기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거짓은 거짓을 낳고, 반복되는 거짓은 모든 질서를 비틀어 결국 우리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내 뜻을 비우고 아버지의 뜻을 찾는 것, 바로 그것이 아버지께서 보시기 좋으셨던 우리의 참 모습으로 회복하는 치유입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제 오늘 말씀과의 마지막 걸음을 내딛습니다. 저는 저 하늘과 좀 더 가까워진 듯한데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저는 오늘 이 길에서 그분을 뵈었는데 여러분의 그분은 어디쯤 계시던가요?
9월 25일 연중 제26주일 : 마태 21,28-32
고태권(그레고리오) 신부, 새 사제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오늘 복음의 상황은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시는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으려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되는 순간에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 말씀 중 하나입니다. 복음에서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부류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맏아들과 또 다른 아들, 세리와 창녀들, 그리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대조되는 부류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세밀히 살펴보면, 대조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는 두 가지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생각을 바꾼 부류와 생각을 바꾸지 않은 부류로 분류되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부류와 뜻을 실천하지 않은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싫습니다.”라고 이야기 했던 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고, 세리와 창녀들은 세례자 요한을 믿었습니다. 반면 “가겠습니다.”라고 이야기했던 또 다른 아들은 일하러 가지 않았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세례자 요한이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에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라는 부분에서 이러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을 바꾼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반면, 생각을 바꾸지 않은 부류는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십니다.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밭에 가서 일하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이 오죽 싫었으면 맏아들이, “싫습니다.”라고 딱 잘라 말하였겠습니까? 그런 그가 생각을 바꾸어 밭에 일하러 가는 선택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 세리와 창녀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부류의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 - 아버지의 뜻 - 을 믿고 실천하는 선택하는 것 역시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쉽지 않았을 선택을 그들은 하였습니다.
새 신부라고 불리는 저도 생각을 바꾸어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여러 번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족과 직장의 일들 그리고 여러 가지 어려움들 사이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위해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아마 여러분들에게도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르쳐 준 의로운 길,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 역시 쉽지만은 않은가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생각을 바꾸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오늘 복음의 맏아들을 보며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세리와 창녀들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시니, 다시 힘을 내어 생각을 바꾸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 합니다. 비록 그 길이 어렵고 쉽지 않겠지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마태 21,28)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실 준비를 저와 함께 하시겠지요?(마태 21,31)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아버지의 뜻을 따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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