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정된 이후 대구대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남방 복음화의 중심이었던 계산성당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도심 속 성지이다. 계산성당 인근은 대구 근대 문화의 중심지로서 성당 마당에는 이인성 나무가 심겨 있고 인근에는 민족시인 이상화의 생가가 있다.
계산주교좌성당의 전신은 대구본당으로, 1885년 말 로베르(한국명 :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에 사제관을 지음으로써 시작됐다. 1888년 새방골(송골, 현 대구시 달서구 죽전동)로 거처를 옮긴 후 1891년 현재의 자리인 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자리한 것이 현재의 주교좌성당 계산성당이다.
계산동에 정착한 로베르 신부와 신자들은 성전 건축과 새 사제관을 짓기 위해 힘을 쏟았고 1899년 마침내 한식의 십자형 기와집 성당과 사제관, 신자 교육관으로 사용될 해성재 건물을 완공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성당을 봉헌한 지 40일 만인 1900년 2월 4일 지진으로 인한 화재로 성당이 소실되었다.
한국 건축 양식의 걸작으로 그토록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였던 아름다운 노트르담(성모 마리아)의 루르드 성당이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되었다.
밤사이 이상한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즉시 일어나 문을 열어 보니 한국식 십자형 성당이 온통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얼른 뛰어가 성당 옆문을 박차고 성가대석으로 가려고 했지만 불길이 번져 마당으로 나와 쓰러졌다. 얼굴에 반쯤 화상을 입은 채 몸을 일으켜 종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위급함을 알렸다. 잠시 후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조선군대와 일본군대도 달려왔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건물 내부가 온통 화염에 휩싸여 창문과 출입문 등으로 불길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가까이 간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근처에 있는 집을 보호하자면 이미 불이 붙은 성전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불길이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해성재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성수가 가득 담긴 병과 루르드의 물병을 들고 나와 불 속에 던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화염이 건물 안으로 몰려들더니 이웃 초가집들을 손상 입히지 않고 사그라졌다. - <화재 상황을 파리 외방 전교회에 보고했던 로베르 신부의 서한 중 일부분>
본당 설립 후 14년 만에 어렵게 건립한 성당을 화재로 잃자 모든 신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로베르 신부는 오히려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화재가 발생한 지 일주일 만에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호소문을 발표했다.
“천주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고 두렵고 거룩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신덕을 시험하시고 더 큰 은혜를 주고자 하심입니다. 다시 성당을 더욱 잘 짓기로 한 마음으로 협력해 주십시오.”
 
 
1902년 11월 25일 영남 지방 최초의 웅장한 고딕식 건물이자 성전인 계산성당이 마침내 완공되어 1903년 11월 1일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의 주례로 성대한 성전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정되면서 계산성당은 대구의 주교좌성당이 되었고 초대 감목 드망즈 주교에 의해 증축되었다. 신자들은 계속 늘어났고, 루르드 성모를 주보로 모시고 영호남 지방 사목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1962년 7월 5일 계산주교좌성당에서 대구대교구 승격 및 서정길(요한) 대주교 착좌식이 거행되었고 1972년에는 대구 사회에 가톨릭 문화를 심게 될 계산문화관이 착공되었다. 계산주교좌성당은 1981년 대구시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으며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5월 5일 방문한 바 있다.
   
교회역사만이 아니라 건축사, 문화사적으로도 깊은 의미를 지니는 계산주교좌성당은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성지이며, 누구나 편히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이자, 도심 한가운데에 서 있는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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