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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부의 먼 곳에서 만나는 예수님
일과


마진우(요셉)|대구대교구 신부, 볼리비아 선교 사목


새벽 5시 반, 잠이 깨었다. 어제 밤늦게까지 새로 온 후배들(김대식 토마스 신부, 연상모 루카 신부)이 하숙하고 있는 본당에 스페인어 어학용 프로그램을 설치해주러 갔다가 늦게 돌아온 터였지만 늘 그렇듯이 눈이 떠졌다. 누워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일어날까, 말까….”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고 적어놓은 해야 할 일들 목록을 살펴보았다. 교사 피정 동영상 만들기, 운동하기, 아침기도, 교사 출석부 정리하기, <빛>잡지 글 적기, 가톨릭신문 만화 그리기, 문덕이(키우는 개) 목욕시키기…할 일들이 무수히 나열되어 있는 가운데 오늘은 과연 얼마나 할 수 있으려나 살짝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오전 9시에 볼리비아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요니 아줌마와 만나기로 했었지, 그럼 8시 40분까지는 헬스장을 나서서 거기 도착한다고 계산을 하고, 도착해서 주차하는 시간과 운동하는 시간을 1시간 20분 정도 빼면 7시 20분, 거기까지 가는 데 30분 정도 걸릴 테니까, 씻고 준비하려면…대충 계산이 나온다. 6시 10분, 지금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자마자 가방에다가 장례 예식서와 영대를 챙겨넣었다. 그리고 11시에 꼰스딴띠노 아저씨의 장례예절을 해 주기로 한 게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에 미리 싸 둔 헬스장용 옷 보따리를 다시 챙기고 혹시 빠진 게 없나 살핀 후에,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성무일도를 들고 와 기도를 바치고 나니 어느덧 6시 반이 훌쩍 넘었다. 차를 타고 나섰다.

어제 근처 동네 사람들이 자기네 동네 도로 포장을 해 달라고 폐타이어와 차로 길을 막고 데모를 하는 통에 그 곳을 지나가지 못해 다른 길을 찾느라 곤욕을 치룬 기억이 났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도 길은 막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불과 몇 십 분의 차이로 출근 시간에 얽매여 차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시간을 넘기지는 않고 시내의 헬스장에 도착했다. 한 주 전, 마석진(프란치스코) 신부의 권유로 헬스장 1년 치를 끊고 시작한 지 이제 겨우 한 주 남짓, 별다른 차도는 보이지 않지만 뛰고 나서 느끼는 그 상쾌한 기분이 좋아서 운동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오늘은 윗몸 일으키기는 하지 않았다. 어제 좀 욕심을 내서 너무 무리했는지 아직도 배 근육이 아리다. 1시간 남짓 시간이 흐르고 헬스장을 나와 시내로 나갔다. 배가 고파서 5볼리비아노(한화 700원 정도)를 주고 시내 중앙공원 옆에 있는 분식집에서 ‘아사디또(고기산적과 비슷한 음식)’를 사다가 매운 양념을 한껏 얹어 먹었다. 기왕 시내에 온 김에 교구청에 들렀다. 입구에서 사무를 보는 아니따 아주머니와 정겹게 인사를 나누고 본당 사서함에 뭐 온 게 없나 살핀 후에 물을 한 잔 받아 마셨다. 그러는 통에 사무처장 신부님이 나를 찾는다. 새로 온 신부님들의 데이터를 아직 못 받으신 모양이다. 나에게 신부님들 영문 이름을 묻고는 종이를 두 장 뽑아 준다. 못 채운 데이터를 채워 오란다.
그러는 중에 어느덧 시간이 되어 요니 아줌마에게 전화를 드리고는 나가서 함께 사무소로 가서 사인을 여러 번 하니 일이 끝났다. 시간이 좀 남아서 집에 돌아와서 40분 정도 잠시 쉬었다. 다시 나서서 본당에서 장례 때문에 만나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니 늘 그렇듯이 제 시간에 오질 않는다. 아침에 미리 전화를 했었는데도 이렇다. 다시금 확인 전화를 하니 방금 전에 나섰단다. 분명 내 전화를 받고 그제야 나서는 것이리라 생각을 하며 잠시 속에서 역정이 올라오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이 동네 밥 먹은 지 벌써 3년째다. 이 정도로 화를 내면 화 낼 일이 너무 많다.

기다리는 중에 한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와서 세례를 받으려면 조건이 뭐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옆에 서 있는 아저씨가 대부 설 수 있을까 묻는다. 뭔가 의심쩍었다. “교회혼 하셨어요?”라고 물으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했다고 대답한다. 정말이냐고 물으니 그제서야 실토를 한다. 개신교에서 교회혼을 했단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가톨릭 교회혼을 한 대부 아니면 가톨릭 신자 중의 독신남녀를 찾아오라고 했다. 그러는 통에 사람이 왔다. 함께 가서 돌아가신 지 한 달째 된 아저씨의 영혼을 위해 정성들여 기도하고는 사람들에게는 스스로의 죽음을 잘 준비하라고 강론을 했다. 돌아오면서 본당에 들러 근무를 서던 석상희 신부님을 모시고 집에 와 함께 밥을 먹었다. 식사를 하면서 또 식사를 마치고 그날 있었던 일들을 서로서로 나누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오후 일과를 위해 우리들은 헤어져야 했다.

말이 너무 많았네요. 하지만 남미 선교사의 하루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어설프게나마 반 토막 일과를 소개해 드립니다. 물론 제가 어느덧 이 곳 생활이 3년쯤 지나 대화에 큰 무리가 없다는 건 기본적으로 감안하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이겠지요. 지금 갓 도착한 두 신부님들은 분명 적잖이 말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을 테니까요. 제가 적은 일과를 제가 다시 들여다보면서 느끼는 것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는 중요한 게 아닌 듯 싶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서울 시내의 번화가 거리에서 정말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공허하게 일하는 것보다는, 길 가의 쓰레기를 치우면서도 뿌듯한 보람을 느끼는 일이 한 인간에게는 더 소중하지 않을까요? 내가 하는 일이 참 좋습니다.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또 남아있는 일을 하러 가보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