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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동화
열매는 어디 갔을까?


조현열(토마스 아퀴나스)|성정하상성당, 동화작가, 의사



껍질이 거칠고 줄기도 몹시 휘어진 사과나무가 있었답니다. 볼품은 없어도 그러나 가을이면 어느 나무보다 크고 많은 열매를 맺었어요. 다만 해마다 우듬지에 꼭 한 개, 작고 못생긴 열매 하나를 제외하면 말이에요. 조금이라도 더 땅속의 물기와 양분을 빨아들여 꽃과 열매에 옮겨주느라 나무는 늘 메말라 있었어요.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몸을 맡겨야 네 가지가 다치지 않는 거야.”, “대궁이 약한 꽃과 열매는 미리 떨어뜨리는 게 나아.”, “가지에 맺힌 대로 열매를 다 어떻게 키우니? 그러다간 나중에 가지가 무거워 부러질 걸?”

작은 바람이 불고 조금만 비가 내려도 오히려 더 꼿꼿이 몸을 움츠려 세우는 사과나무를  보며 덩치가 큰 친구 나무들이 염려하였어요. ‘너희들은 몰라. 겨우 내 가지 끝에 붙어 있는데, 어떻게 맺은 열매들인데 내가 내 몸을 아끼려 든단 말이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약한 꽃눈이, 여린 열매가 다 떨어진단 말이야. 바람을 따라 몸을 흔들면 내 몸이 부드러워져 밑둥치 줄기가 튼튼해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 그렇지만….’

사과나무가 처음부터 저렇게 여위고 못생기진 않았어요. 다른 나무처럼 곧고 튼튼하게 잘 자랐었지요. 그런데 처음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즈음 뿌리 근처에서 두더지가 구멍을 파고 나무밑둥치를 갉아먹기 시작했어요. 처음 사과나무는 그렇게 아픈 것은 누구나 다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아름답고 탐스러운 꽃과 열매를 맺는데 그만한 고통이 없으면 어찌 이상하지 않겠냐고…. 처음 맺는 사과열매에 들뜨고 온 마음을 쏟느라 밑둥치에 구멍이 더 커지고 뿌리가 삭는 것도 몰랐어요. 그저 자꾸만 잎이 마르고 열매가 떨어지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이었지요. 마침내 그것이 두더지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무는 화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내 잘못인 걸 뭐. 미리 준비를 했더라면, 그리고 더 빨리 손을 썼더라면….’

사과나무는 갉아 먹혀서 구멍이 뚫린 자리를 지탱하기 위해 몸을 틀어 숙였어요. 끊어진 뿌리를 이으려 땅 아래쪽으로 깊이깊이 내려갔어요. 그러다보니 사과나무는 꽃가지에게 물과 양분을 나르는 것을 소홀히 했나 봐요. 막 부풀어 오르던 열매가 다 떨어지고 잎사귀도 말라 버려서 허리가 몹시 휘어진 앙상한 줄기만 남게 되었지요.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가지엔 꽃눈이 조금 남아있었는데 사과나무는 몇 개 되지 않은 꽃망울에 온 정성을 쏟았어요.

가을이 되자 사과나무엔 몇 개나마 작은 열매가 달렸어요. ‘비록 초라하긴 해도 구멍 뚫린 줄기와 잘려진 뿌리로 이 정도라도 맺은 것은 참으로 신기해.’ 뚫린 구멍 속으로 온갖 벌레들이 들어와 자꾸만 몸을 갉아먹는 바람에 사실 나무는 제 몸 하나 지탱하기도 힘들었거든요. 그래요. 다음해부터 사과나무는 온 힘을 다해 꽃과 열매를 맺었어요. 열매나무가 꽃과 열매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거지만 이 사과나무는 맺는 꽃 잎사귀 하나, 찾아오는 벌 나비 하나도 그냥 내버려두는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가지 끝엔 자기 줄기 마냥 뒤틀린 열매 한 개가 꼭 맺곤 했어요. 아무도 따가지 않아 오랫동안 달려 있다가 두더지가 뚫어놓은 밑둥치 구멍 속에 떨어져 묻히는 그 못생긴 사과열매에 사과나무는 차츰 마음이 끌렸지요. ‘나 때문에 저렇게 못생긴 게 맺힌 거야.’ 사과나무는 그것이 달려있는 가지 쪽으로 양분을 더 올려 보냈지만 그 열매는 늘 쪼글쪼글하고 비틀려 자라기만 했지요. 그래도 그냥 땅에 떨어지지 않고 자기 구멍 속으로 안기는 못생긴 열매가 사과나무는 좋기만 했어요. 그렇게 세월이 갔어요. 여전히 못생긴 사과열매는 매년 하나씩 맺혔다 떨어졌고, 나무가 조금씩 커갈수록 못생긴 열매도 멀리 맺히게 되어서, 떨어지다 혹시 구멍 밖으로 구를까봐 나무는 구멍을 자꾸 옆으로 크게 키워나갔어요. 그럴수록 무거운 꽃과 열매들을 매다느라 나무는 점점 틀어지고 휘어져갔어요.

어느 해 봄날이었어요. 여느 때와 똑같이 벌과 나비가 날아들고 마른 가지에 꽃을 피우는 봄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나무 둥지 구멍 속에서 꽃눈이 하나 돋더니 금세 무언가 열매하나가 맺기 시작한 거예요. 이상한 일이지요. 하고많은 가지를 놔두고 흙과 이끼가 뒤덮인 지저분한 구멍 속으로 꽃이 피고 열매가 맺다니요. 하루가 다르게 예쁘게 자라는 열매에 나무줄기는 설렘과 즐거움에 빠져 온 몸이 흔들렸어요. 그 어떤 거센 바람에도 꿈쩍도 않던 나무가 말이지요. 햇볕도 들지 않는 좁은 곳에서 예쁜 열매도 구멍 속 나뭇가지를 꼭 붙들고 자라더니 어느 샌가 구멍을 꽉 채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언제부턴가 나무는 허리가 펴지기 시작했어요. 구멍 속에서 자라는 열매에 몸을 의지하면서 말이지요.

세상에나,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요? 열매가 나무를 지탱하다니요. 사실은 거친 나무옹이 모서리가 열매의 여린 속살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온 힘으로 그 구멍테두리에 힘을 주는 덕분에 허리가 펴진 것인지도 몰라요. 그리고 예쁜 열매가 자라는데 눌리지 않게 나무는 제 구멍 속을 넓혔지요. 스스로 제 몸을 긁어내는 것이 왜 그렇게 기쁘고 가슴 벅찼을까요. 어디 나무만이 제 몸을 깎았을까요. 그 좁은 구멍 속 거친 옹이 모서리들이 예쁜 열매의 껍질과 속살을 찢어대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었을까요?  행여나 나무가 다칠세라 구멍 속으로 거친 비바람을 막으며 예쁜 열매가 말 않고 힘들어한 것은 나무가 헤아리지 못한 게 더 많았었을 거예요.

그런데 계절이 깊어갈수록 나무와 열매는 차츰 걱정이 되었습니다. “예쁜 열매야, 요즘 네 얼굴빛이 참 안 좋아 보이는구나.”, “아니에요. 나는 괜찮은데 사과나무님이 무척 수척해졌어요.”, “음, 난 알아. 너처럼 예쁜 열매가 언제까지나 구멍 속에서 자랄 수는 없다는 걸. 내가 아무리 뿌리에서 양분을 길러 와도 싱싱한 햇볕과 바람까진 전해줄 수 없잖아?”, “저는 괜찮지만 나무님이 걱정이에요. 제가 커질수록 구멍 안을 넓히느라 속을 깎는 고통을 겪고 있잖아요? 점점 구멍이 커져서 허리가 꺾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거든요.”, “네가 더 크고 싶어도 내가 다칠까봐 더 안 자라려고 하는 애틋한 마음도 알아. 끝까지 품에 안고 겨울을 날 수 없다는 것도 알아. 내 품이 너를 추위와 날짐승들로부터 보호해줄 수 없다는 것도 알아.”, “…….”, “아직은 밑둥치의 흙에 덮여서, 그리고 일부러라도 먼지와 껍질이 뒤덮여 아무에게도 발견되고 있지 않지만 곧 잎사귀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가 드러날 때쯤 되면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겠니? 그땐 누군가가 너를 따갈 것이라는 것도 알아.”

누군가가 다녀가고 그래서 우려했던 일이 일어난 후 사과나무에겐 그 가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어요. 긴 가을 밤낮 열매향기를 그리워하며 열매가 차지했던 그 옹이 텅 빈 공간을 지탱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어요. 구멍 입구를 훑으며 나는 바람소리가 그렇게 시리고 아플 수가 없었고 바람에 떨리는 나무껍질 하나하나가 그렇게 저릴 수가 없었어요. “저, 사과나무님, 그만 일어나세요. 이제 날이 따뜻해졌어요. 작별인사를 하려고요.”, “으응? 내가 잠을 잤었나? 그런데 넌, 너희는 누구니?”, “사과나무님, 기억 안 나세요? 겨울이 다 되어도 둥지를 찾지 못하던 저희를 따뜻이 맞아주었잖아요?”, “으응? 언제? 누가? 나는 잘, 잘 모르겠는데…. 가만, 너희들은 다람쥐로구나. 그런데 무, 무슨 일이 있었지?”, “아이참, 지난 가을 사과나무님이 그루터기 구멍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우린 얼어 죽었을 거잖아요. 우린 그때까지 놀기만 해서 겨울을 날 집을 못 구했거든요.”, “내 구멍? 아하, 너희들, 내 구멍 속에서 한 겨울을 살았나 보구나.”, “진짜 기억 안 나세요? 이상하네? 낙엽 속에서 우리들이 떨고 있을 때 구멍 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는데….”, “그, 그랬었나?” “그런데 사과나무님, 나무님은 아세요? 나무님 구멍 속은 너무나 포근했어요. 구멍 속 바닥은 어찌나 매끈하고 편안한지, 우리가 아무리 뒹굴어도 괜찮았거든요. 또 구석에는 맛있는 과일열매들이 많이 있었어요. 울퉁불퉁하고 못생겨 보였지만 얼마나 맛있었다고요. 아저씨가 저희를 위해 남겨두었던 거잖아요? 덕분에 지난 겨울, 참으로 행복했어요.”

“그래? 내 구멍 속이 편안했다고? 그 속에 과일열매가 있었다고? 으음, 그 못생긴 사과가 해마다 썩지 않고 거기 있었구나. 너희를 배불리게 했구나. 맛있었다고? 그 못생긴 게 너희들에겐 맛있었다는 말이지. 잠깐, 그, 그러지 말고 너희들 좀 더 있지 그래. 아직 바람도 차가운데….”, “예, 저희들도 더 있고 싶은데 며칠 전부터 저기 저 어미 새들이 둥지를 찾고 있는 게 보여서요. 곧 알을 낳을 거 같은데 아직 튼실한 집을 짓지 못한 거 같아요. 저 새들에게 이곳을 내어주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우린 이제 힘이 많이 생겨 우리 힘으로 집을 지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너희들 온기로 한 겨울 잘 지냈던 거 같구나. 고맙다. 얘들아. 잘가….”

다람쥐 형제들이 떠난 자리에 곧 산새들이 날아와 알을 낳았습니다. 알에서 곧 새끼들이 깨고 자라서 지저귀는 모습을 보며 사과나무는 자신의 텅 빈 구멍이 남들에겐 아늑한 둥지가 된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흐뭇했습니다. 이제 다시 꽃이 피고 여전히 한쪽 가지엔 못생긴 열매가 맺어도 사과나무는 즐거웠어요. 가지를 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옆 사과나무들이 어깨를 걸쳐주었어요. 그러면서 누군가가 살짝 이야기했어요. “사실 네 옹이 속에 벌레집이 생겨서 걱정을 했는데, 참 다행이야.”, “벌레집이라고? 내 구멍 속에? 아, 아니야, 그건 열매였어. 나를 위해 열린 예쁜 열매였어.”, “열매라고? 하하, 무슨 열매가 나무속에서 여니? 그건 네 속을 갉아먹는 벌레의 거푸집이었다니깐.”

그 누가 무어라 해도 사과나무는 알지요. 오직 자기만을 위한 열매가 자신 속에서 열렸다는 것을. 사과나무는 바람이 불자 가지를 모두 벌려서 출렁였어요. 그래도 이제는 꽃들도 열매들도 떨어지지 않았지요. 그 못생긴 열매도 마찬가지였고요. 해마다 번갈아 구멍 속을 드나드는 동물들 덕분에 사과나무에는 어떤 나쁜 벌레도 살지 못했어요. 밑둥치에서 동물들이 거름도 잘 만들어주었거든요.(* 2005년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임을 밝힙니다.)


* 동화작가이면서 나라신경외과 원장인 조현열 님은 200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작품집으로 《불을 잠시 꺼 보렴》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