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오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지 1년이 채 못 되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좀 더 사실 것으로 생각했었고, 암이라는 판정을 들었을 때도 이제 머지않았구나 하고만 생각했지 항암치료 단 한 번에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죄송스럽고 섭섭하고 서러워서 많이 힘들었었는데, 또 한 편 그 때만큼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깊이 느꼈던 적도 없다. 배짱이 편하고 모든 일이 잘 돌아갈 때는 다 제가 잘 난줄 알고 살다가, 막상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상황이 닥쳐야 살려 주십사고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나는 신부라서 좀 나은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다는 걸 그 때 알았다.
주변의 열심한 교우들이 기도해 주고 위로해 주는 고마움을 절실히 느낀 것도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였고,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신 주님의 말씀이 느꺼워서 울먹인 것도 어머니의 장례미사를 드릴 때였다. 성체를 모시면서, 이것이 주님의 몸이니 주님과 함께 계시는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라고 새삼 깨우치며 말할 수 없이 위로를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만약 내가 예수님을 몰랐더라면, 부활을 바라는 믿음을 갖지 못했더라면 어떠했을지 생각하면 두려움에 소름이 돋는다. 효도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내가,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죄송하다고, 감사하다고 말씀드릴 기회를 영영 놓쳐버렸다고 생각했다면 그 외로움과 한스러움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태중에서부터 성당에 다닌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서야 비로소 신앙을 갖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조금 깨닫게 된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가장 뚜렷한 경계는 죽음을 대하는 모습이다. 옛 로마 사람들의 격언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그 짝이 되는 말은 ‘카르페 디엠(carpe diem)’인데, 오늘을 즐겨라, 라는 뜻이다. 합쳐놓고 보면 너는 조만간에 죽을 터이고 죽으면 만사가 끝장이니 살아있을 때 즐기라는 내용이 된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그야말로 만사의 끝장이다. 하지만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인생의 끝장이 아니라 인생의 전환점이이다. 죽음을 통해 우리는 세례 때의 약속, 주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처럼 나도 내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던 그 약속을 마침내 채운다. 주님께 모두 드린다고 말은 하면서도 늘 남는 것, 덜 아까운 것을 바쳐 왔지만, 이 마지막 순간에는 참말 내게 있는 것을 다 바치는 것이다. 주님께서 계시는 그곳에 나도 함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궁극적으로 삶의 방향은 두 가지이며, 이 두 방향은 모두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다른 이들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자기가 살고자 하는 것이 한 방향이고, 자기가 죽음으로써 다른 이들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 또 한 방향이다. 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분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사랑의 진면목임을 우리는 그분에게서 배웠다.
위령성월은 해가 줄어들고 낙엽이 지는 계절이라, 죽음을 생각하는 데 마침 잘 들어맞는다. 하지만 우리는 무의미하게 사라져 버리는 우울하고 덧없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님의 죽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만날 이들, 우리를 앞서 세상을 떠났지만 주님 안에 살아있는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다른 천당 복락은 주님께서 상세히 설명해 주지 않으셔서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복만큼은 꼭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님 품에 계신 어머니를 다시 뵙는 복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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