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우리는 지하실 석탄창고에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용감한 국군 아저씨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국민은 정부를 믿고 안심하라.’는 대통령의 말씀만 믿고 잠을 청하려 했으나 들려오는 폭음 때문에 잠도 설치고 날이 밝자, 나는 명동성당으로 뛰어갔다.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미사에 참례하고 있었고, 미사가 끝나자 신부님은 전쟁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리 고해성사를 볼 사람은 보라고 이르셨다.
명동성당 마당에서 을지로를 내려다보면 지금은 고층건물들이 들어서서 보이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을지로 2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 길에 전차(탱크)가 수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그것이 국군탱크인 줄로만 알았는데 탱크마다 붉은 기를 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저것이 인민군 탱크다.’하고 소리쳤다. 나는 놀라 다시 병실로 돌아와서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만 땅이 꺼져라 했다. ‘아아! 우리는 이렇게 죽는구나!’하고 절망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하면서 우선 정확한 전쟁 소식이라도 듣고 싶었지만 우리에게 들려줄 사람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인민군이 서울 시내에 탱크를 몰고 다니는데 라디오에서는 ‘우리 국군은 용감히 적을 무찌르고 전쟁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고 직장을 지켜라.’고 밤새도록 반복하고 또 아침까지도 계속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대통령은 이미 국민을 속이고 미리 도망가 있으면서 방송국에는 녹음기를 꽂아 두었다고 했다. 그 거짓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난도 못 가고 죽어 갔으며, 또 인민군한테 잡혀서 곤욕을 치렀는지 상상이나 했겠는가. ‘당신이 국민을 위한 대통령인가?’라고 묻고 싶다.
지금 이 글을 쓰며 생각해봐도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뿐 아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다음도 또 그 다음도 그렇고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 대통령만 빼고 국민을 위한답시고 나라 돈을 제 쌈짓돈인 양 먹고 감추고, 아들들을 감옥에 처넣으면서 버젓이 T.V.에 나와서 이러쿵저러쿵 얼굴색 하나 붉히지 않는 사람들, 그들한테서 국정의 무엇을 배워 보겠다고 청와대에 초청하고…. 취임 일 년도 안 되어 ‘못 해 먹겠다.’는 둥, ‘어느 당의 받은 돈의 십분의 일이 넘으면 그만 두겠다.’는 둥. 대통령 직이 아이들 장난인가! 우리 민족은 과거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하느님, 하느님. 당신은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하시려고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아직 얼마나 더 이런 지도자들 밑에서 고생해야 하는지요?’
그런 절망 상태에서 며칠을 지나다가 어느 날 점심 때가 되자 명동네거리에서 인민재판이 있다며 길거리에서 외치고 다녔다. 겁도 났지만 호기심도 생기고 정말 인민재판을 하면 총살을 어떻게 시키는지 궁금하기도 하여 사람들이 모이는 쪽으로 가보았다.
책상 위에 흰옷을 입고 손이 묶인 채 한 사람이 서 있고, 밑에서 인민군이 그 사람의 죄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미군 앞잡이와 연락해서 우리 동지들을 고발했고, 스파이 노릇도 하고….’ 흘깃 성당 쪽을 쏘아 보더니 ‘신부를 도와주었다.’는 둥, ‘우리 인민들을 못살게 했다.’는 둥 죄도 아닌 죄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이런 반동놈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하고 말했다. 모인 사람들 중 맨 앞줄에 있던 사람이 ‘죽여라! 죽여라!’하고 외쳤다. 나머지 사람들은 군중심리에 휘말려 거의 모두가 ‘죽여라! 죽여라!’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인민군이 총을 뽑더니 겨누지도 않고 흰옷 입은 사람의 허벅지 쪽을 쏘았다. 죄수를 총살 하려면 머리나 가슴을 쏘아야 하는데 왜 다리에 총을 쏘는지 하고 의아해 했다. 그러나 곧 다리를 쏜 이유를 알았다. 인민군이 하는 말이 ‘이 반동 새끼는 그냥 죽이기 아깝고, 죄상이 많아서 고통스럽게 죽게 하기 위해 다리를 쏜 것이오!’라고 했다.
다시 입원실로 돌아와 ‘이제 우리도 언제 저렇게 죽을지 모르겠구나.’하며 불안함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니나 다를까, 성모병원을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모든 환자를 퇴원시키되, 의사나 간호사는 그대로 남아있으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우리는 오갈 데가 없으니 우선 병실에서 간호사들과 함께 기거했다. 인민군은 남아있는 환자 수와 일하고 있는 간호사 수 등을 조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그곳에서 머물 수 없었다. 신 보니파시오 수녀님(지금은 은퇴해서 휴양 중에 계신다.)은 근처 신자 집에 방을 하나 구해서 우리 더러 그 곳에 가 있으라고 했다.
식사 때가 되면 사람을 시켜 아침에 하루 먹을 밥을 냄비에 담아 보내주셨다. 그런데 점심 때가 되면 더운 날씨에 밥이 쉬어서 먹지 못할 지경이 된다. 하지만 그것마저 먹지 못 하면 어쩔까, 하고 걱정하다가 주인 집 아주머니께 묻기로 했다. ‘쉰밥은 찬물에 씻어 먹어라.’고 했다. 점심까지는 밥을 씻어먹으면 되는데, 저녁이면 밥에 주걱만 대도 줄이 죽죽 생기기 시작해서 씻어도 흐느적거려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아깝지만 버릴 수밖에…. 숨어살면서 두 사람이 하루 먹을 밥을 ‘여기 밥 남는 거 있소.’하고 남에게 나눠줄 처지는 더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한꺼번에 다 먹지도 못하니 참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던 중 신학교로부터 아직 남하하지 못한 신학생들은 신학교에 들어와서 살아도 좋다는 전갈을 수녀님을 통해서 들었다. 다시 혜화동 신학교에 갔더니 20여 명 학생이 남하하지 못하고 머물고 있었다. 그 때까지 학교에 남아 계시던 분들은 한공열 부학장, 철학교수 오기순 신부님, 조창희 경리 신부님 그리고 전 문교부장관 고광만 씨가 숨어 살고 있었다. 내가 좀 모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사람은 다 그런 절박한 와중에서도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지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하루는 그 전 해 봄부터 유행했던 유행가가 생각이 나서 혼자 흥얼거리고 있었더니 목포 출신 고 아무개(후에 인민군에 잡혀서 전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국군 입성 직전에 처형되었음.)라는 선배님이 그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점심 먹고 틈만 나면 그 노래를 같이 불렀다. 같이 그 노래를 합창으로 부르다가 대 선배한테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 야단도 맞았다. 그 노래는 현인 씨의 ‘신라의 달밤’이다. 잠깐 동안은 그런 여유로운 시간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혜화동 파출소(당시는 인민군들이 점령해서 내무서로 사용하고 있었다.)에서 사람이 와서 대표자는 내려오라고 했다. 4품 받은 이북에서 온 신학생인 김 아무개가 다른 한 사람과 같이 파출소로 갔다. 나는 행여 어떻게 되는가 싶어서 다른 길로 가는 척 하면서 뒤따라갔다. 그때가 여름이었기 때문에 파출소 옆 나무 그늘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나도 거기에 끼어 이야기를 듣는 척 하면서 파출소 안을 살폈다.
파출소 안에서는 인민군이 신학생을 다그쳐 물었다. ‘어제 저녁에 총을 쏘았지? “총이 없는데 어떻게 쏩니까?”우리는 총 쏘는 소리를 들었는데! 동네 사람들도 신학교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고 하던데?’하며 말도 되지 않는 거짓말로 다그쳤다. ‘신학생들은 총이 없는데 어떻게 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인민군은 국군 패잔병들이 신학교에 갔다는 말이 있으니 그런 사람이 오면 꼭 연락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겁을 잔뜩 주고는 돌아가라고 했다. 신학생들이 파출소를 나가고 난 다음, 둘이서 주고받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한 사람이 하는 말이, ‘저 사람들은 우리하고 주의 주장은 달라도 거짓말은 안 해. 그러니 먹을 거나 좀 가져오라고 할 걸 그랬다.’면서 또 다른 사람더러 신학교에 가서 먹을 것을 좀 가져오라고 심부름 보냈다. ‘공산당의 인민군들도 신학생들이 거짓말 안하는 줄 아는구나.’하고 쓴 웃음을 지었다.
7월도 중순이 지났다. 전선은 점점 남으로 내려가고 있었고, 대전을 지나 대구까지 갔다는 둥, 김일성이 대전까지 왔다 갔다는 둥, 미국이 한국을 포기했다는 둥 들리는 소식마다 미확인 소식이라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길이 없고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그 때의 답답했던 심정을 무엇으로 표현 할 수 있을까? 어떤 문장가라도 우리가 답답했던 만큼의 그 답답함을 글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로지 그런 상태에서 6.25라는 미증유의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하늘이 두 쪽 나도 그 심정을 모를 것이다. 인간은 간사한 존재이다. 그런 답답한 때 거짓이라도 좋으니 누구라도 ‘국군이 인민군을 무찌르고 북으로 처올라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그만큼 우리 마음은 절실했다.
신학교에서 몇 안 되는 학생들의 일과는 아침미사 - 조식 후 모여서 전쟁 걱정, 점심식사 후 모여서 전쟁 걱정, 저녁식사 후 잘 때까지 전쟁 걱정, 기도는 각자 수시로 알아서 하기…. 일과표 끝. 그 때 같이 신학교에서 살던 학생들 중 많은 분들이 전쟁 중 학살당하고 더러는 신학교를 그만 두었기 때문에 알 길이 없고, 신부가 된 두 사람 중 한 사람도 돌아가시고 나머지 남은 한 사람이 바로 나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고 아프다. 같이 죽을 고비를 넘긴 선배들이고, 동료들인데 이제 그 때 이야기를 나눌 친구조차 없다. 모두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만이 아니고 지금 가끔 생각나는 것은 그 때 만났던 인민군 장교들과 졸병들이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얼굴들도 있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살아있기나 한지…. 이 모든 것도 하느님 섭리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인간이 애타게 생각해보았자 무엇하겠는가. 다만 그들 역시 그리스도 십자가의 대가로 구원되었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11시 경, 인민군의 장갑차, 자동차, 트럭 할 것 없이 신학교 언덕길에 수십 대가 올라왔고, 그 밤중에 인민군 장교가 우리더러 모두 일어나라고 했다. 그리고는 신학교 건물 현관문에서 동쪽은 신학생들이 쓰고, 서쪽은 인민군들이 쓰겠다고 하면서 당장 방을 비우라는 것이다. 우리는 20여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자고 있었으므로, 각자 방을 정리한 후 사무실의 물건도 동쪽 방으로 다 옮기고 나니 아침 7시, 밤을 꼬박 새운 것이다. 그 시간부터 우리는 인민군과 한 건물 안에서 살게 되었다.
총을 메고 한밤중에 잠든 사람을 깨우더니 빨리 방 치우라 야단해서, 밤새 쉬지도 못하고 애를 썼더니 배도 고프고 모두 다 지쳐버렸다.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가보니 전부 충혈된 눈으로 묵묵히 밥그릇만 응시할 뿐 아무도 말이 없다. 이왕 일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무엇을 더 생각할 것인가. 그러나 모두 중노동을 했기에 지친 몸보다 인민군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더 걱정하는 눈치였다. 배는 고팠지만 밥이 먹힐 리 만무하다. 한두 마디씩 인사만 나누다가 항상 우리들끼리 전쟁 걱정을 하며 모이던 방에 자동적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행여나 독자 여러분은 인민군과 같이 산다는 것이, 그들도 사람인데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하는가 할지도 모르지만 6.25를 겪은 우리들의 심정은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라 표현해야 정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개구리만 사는 동네에 독사들이 침입했다고나 할까, 그런 심정이다.
우리는 모여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걱정하며 난감한 심정, 무엇이라 표현할 길이 없다. 밤새 잠도 못 자고 해서 각자 흩어져 새우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모이라는 소리에 또 무슨 소린가 하고 모였더니, 오늘 해지기 전까지 학교를 떠나라는 인민군의 명령이란다. 어느 상전의 말이라 거절하랴, 기가 차다. 이 난리통에 어디로 가란 말인가? 우리는 넋을 잃고 말문이 막혀버렸다.
무엇을 가져갈까, 무엇을 들고 갈까, 간들 어디로 갈꼬, 누구를 만날꼬, 모든 것이 막막할 뿐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점심도 먹지 못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서성이며 서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지만 모두 대답은 한 가지였다. “글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오후 다섯 시가 되자, 상급생 한분이 인민군과 교섭해서 먼 길을 걸어가야 하니 쌀이라도 좀 달라 했다. 처음엔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하더니 조금 있다가 쌀 한 가마니를 가져와서 한 사람 앞에 두 되씩 나눠주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닌가, 도둑들한테 제 집에서 쫓겨나면서 제 집 쌀을 빌어 얻다니! 쌀 두 되, 여벌 속옷과 와이셔츠 한 장, 그것이 우리들이 챙긴 짐의 전부였다. 신부님, 수녀님, 주방 언니들 그리고 우리 신학생 20여 명, 도합 60여 명이 운동장 한가운데 모여 오기선 신부님을 한가운데 모시고 모두 꿇었다. 강복 주시는 신부님이나 받는 우리나 전부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전능하신 천주…”, “아멘.” 하고 일어서는 얼굴들은 무언가 비장한 각오를 한 표정이 엿보였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즐겁게 뛰놀던 농구대 옆을 지나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올 땐 이 길을 언제나 다시 올수 있을까, 하고 참말 슬펐다. 언덕길 중간쯤에서 가르멜 수녀님들도 우리와 같은 처지로 쫓겨나오다가 우리 일행과 마주쳤다. 우리는 말없이 목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했겠는가! 언덕길에서 혜화동 로터리를 바라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말없이 우리 일행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 내려와서는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사이로 말없이 서로 헤어졌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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