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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오 신부의 영화이야기
그린 마일(The Green Mile, 1999)


조용준(니콜라오)|성바오로수도회 신부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의 문제는 우리의 신앙을 뒤흔드는 주요한 화두이다. 오해와 편견에 얼룩져 억울한 고통과 죽음이 다가올 때 이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기는 너무나 어렵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 다른 이들의 생명을 희망하고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제를 잘 드러내는 영화 <그린 마일>을 소개한다.

대공황 시대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의 콜드 마운틴 사형수 감방의 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근무하는 폴 에지컴은 어느 날 존 커피라는 큰 덩치의 흑인 사형수를 맞이하게 된다. 덩치에 맞지 않게 너무나 순진하고 겁 많은 그의 모습은 어딘가 두 아이의 살해범이라는 것과 맞지 않아 보이는데, 우연한 기회에 존이 폴의 병을 고치게 되면서 폴은 존을 신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 알아보게 된다. 교도소장 부인의 병을 치유하고 억울한 살인 누명을 받아들이는 존의 모습에서 그의 무죄를 확신하게 되지만 결국 그의 사형집행은 실행되고 존은 죽게 된다.

영화 전반에 걸쳐서 존을 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백인)은 그를 위협적인 흑인이며 살인자, 떠돌이로 파악한다. 이러한 오해와 편견은 존을 진짜 범인 대신 사형수로 죽는 날만 기다리게 만들고(폴이 변호사를 만나는 장면 참고), 사형이 집행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 대한 어떠한 동정과 이해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에 반해 폴은 처음부터 존을 다른 죄수와 마찬가지로 인격적으로 대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어둠을 싫어하는 존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하며 악수를 하는 장면은 이러한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이러한 폴의 친절함과 배려심은 존이 마음을 열고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폴의 고통을 그냥 지켜보지 않고 그를 적극적으로 치유하고, 더 나아가 폴의 부탁(교도소장 아내의 뇌종양 치유)을 마다하지 않는 존의 행동은 억울한 죽음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상황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다른 사람의 오해와 편견 때문에 죽음을 당하게 되지만 정작 존은 다른 이들을 병과 죽음에서 해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사형제와 관련된 것이다. 무죄인 존의 사형 집행을 막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간수들의 모습, 울면서 사형을 집행하고 이후 더 이상 같은 일을 할 수 없어 청소년 교화로 직무를 옮기게 되는 것은 사형제 자체의 모순을 드러낸다. 무죄한 이를 사형시켰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폴이 평생 괴로워하는 것은 존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마지막 장면에서 폴의 독백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터닝포인트

- 폴의 방광염을 존 커피가 치유하는 장면(1:01:27~1:05:58)

샘의 난동이 마무리되자 폴은 방광염의 고통으로 쓰러진다. 이때 존 커피는 폴을 자신의 감방 앞으로 부른다. 그리고 다가온 폴에게 도와주겠다며 치유를 시작한다. 잠시 후 폴을 오랫동안 괴롭히던 병은 사라지게 된다. 존이 누군가를 죽이고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고 치유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장면으로, 자신의 고통에서의 해방과 함께 도움이 필요한 다른 이들에게 존을 인도하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들
- 나의 삶을 통해서 나의 가족과 이웃, 사회에 죽음을 가져 오는가? 생명을 가져 오는가?
- 사형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 조용준 니콜라오 신부는 1992년 성바오로 수도회 입회하여 2004년에 종신서원, 2005년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06년-2008년 NYFA Filmmaking 과정 수료후, 현재 영화, 인터넷, 뉴미디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