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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동화
누에와 아기 바람(1)


조현열(토마스 아퀴나스)|성정하상성당, 동화작가, 의사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아기 바람은 가벼운 몸을 흔들며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다가 문득 어느 작은 집을 지나게 되었어요. 집 주위엔 잎사귀가 별로 없이 키만 삐죽한 나무들이 심겨져 있었습니다. 작은 창문이 열려 있기에 아기 바람은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가 보았지요. 방안엔 여러 층의 시렁이 걸쳐져 있었고 그 위엔 밖의 나무에서 꺾어 온 것 같은 나뭇잎들이 가득 놓여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커다랗고 못생긴 애벌레들이 열심히 잎사귀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었어요. 그 푸르고 싱싱한 잎들이 순식간에 구멍이 나서 없어지는 것을 보니 아기 바람은 밖에 선 앙상한 나무가 몹시 가여웠습니다.

“그렇게 다 갉아먹으면 나무는 어떻게 자라니? 저렇게 여윈 가지 좀 봐. 너희들이 먹어치워서 잎들을 다 잃어버리니까 저렇잖아.” “응? 아기 바람이구나. 앗! 가까이 오지 마. 뽕잎을 흔들면 우리들이 떨어진단 말이야.” “으응? 뽕잎이라고? 너희들이 먹고 있는 게? 음, 그렇다면 너희들은 누에로구나. 전에 들은 적이 있어. 너희들이 비단실을 만든다는 것을. 그런데 생각보다 못 생겼는 걸.”말로만 듣던 누에를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아기 바람이 다가가려 하는데 그때 가지 곁에서 흐뭇하게 누에들을 지켜보던 농부가 창문을 닫으려 했습니다. 아기 바람은 부리나케 창문을 빠져 나왔지만 다시 의기양양하게 뽕잎을 먹는 누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어요.

얼마가 지났습니다. 아기 바람이 다시 집 앞을 지나치다가 닫힌 창문 너머로 힐끔 보니 누에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많이 커져 있었습니다. 저렇게 편안히 먹이를 먹고 잠을 자는 누에가 부럽기도 하고 샘이 났습니다. 자신은 늘 좁고 얕은 골짜기 사이로만 다녀야 하고, 조금만 벗어나면 수많은 나무와 풀 더미에 엉켜 길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늘 엄마 바람을 따라다녀야 하는데 저렇게 편안히 잠을 자는 누에를 보니 아기 바람은 꽤 심술이 났지요. 또 얼마가 지났습니다.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자 아기 바람은 엄마 몰래 골짜기 사이를 빠져나와 양지바른 언덕에서 놀다가 다시 누에가 자라는 집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열린 창문을 타고 들어가니 이번에는 입에 거품을 뿜으며 누에 하나가 하얀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거예요.

아기 바람은 생각했지요. ‘그렇게 게걸스럽게 먹어대더니 결국은 먹은 것 다 토해내고 죽는구나. 저렇게 아래쪽부터 뻣뻣하게 굳어 가는 것 좀 봐.’ 주는 것 없이 미우면서도 한편으론 가여운 생각이 들어 아기 바람은 살며시 다가가 누에에게 물었습니다. “많이 아프니? 얼마나 아프면 거품을 다 토하며 몸이 굳어질까?” “참 이상하구나. 너는 세상을 많이 돌아봤을 텐데 내가 왜 죽는다고 생각하지? 우리는 몸을 바꾸기 위해 지금 준비하는 거야. 이 몸으로는 제대로 날개를 갖추고 하늘을 나는 누에나방이 될 수 없거든!” 몰랐다는 게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아기 바람은 다시 물었어요. “꼭 너를 그렇게 좁은데 가두어야만 하니?” “가둔다고? 하하, 두고 보렴. 지금은 이렇게 밋밋한 허리만 있지만 이 탈바꿈 후에는 아름다운 내 모습에 놀라게 될 걸? 내 날개에 네 손이 닿을 겨를도 없이 말이야. 내가 좀 빨라서 그렇지 곧 다른 누에들도 나처럼 고치를 짓게 될 거야.”

아기 바람은 누에의 말을 잘 믿을 수가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거리고 창문을 빠져나왔습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누에가 좀 괘씸했지만 얼마 전 알에서 깨어나는 새를 본 기억이 있거든요. 작고 하얀 알에서 깨어나는 새들의 모습이 얼마나 신기한지 한참이나 둥지주위를 맴돌았었지요. 아기 바람이 숲을 낮게 지나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바르르 떠는 기척이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살펴보니 풀줄기 사이의 커다란 거미줄에 작은 애벌레가 걸려 있었습니다. 애벌레는 입에서 허연 거품을 내뿜으며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거미가 부지런히 입에서 실을 뽑고 다리를 내저으며 애벌레를 거미줄로 칭칭 감고 있었습니다.

“작은 애벌레야, 너도 지금 탈바꿈을 위해 고치를 틀고 있구나. 그런데 너는 스스로 네 입으로 많은 실을 품어내지 못하는 모양이지? 음, 그동안 먹이를 부지런히 먹지 않았나 보구나. 네 곁의 큰 벌레가 네 엄마니? 너를 도와주고 있는 걸 보니….” 재잘거리는 아기 바람의 소리에 겨우 몸을 움직인 애벌레가 힘들게 말을 했습니다. “으으! 바, 바람이니? 네, 네가…나를 좀, 도, 도와줘….” “무슨 소리니? 내가 너를 돕다니? 나는 내 입으로 실을 뿜어내지도 못할 뿐더러 네 곁에 갔다간 네가 애써 싸놓은 실들이 다 날아가 버릴 텐데?” 언젠가 누에에게 다가갔다가 창피를 당한 기억이 나서 아기 바람은 재빨리 말했습니다. “세게…나, 나에게 다가와 줘. 그러면 나를 묶어놓은 거, 거미줄을 끊, 끊을 수 있… 악!” 가만히 살피던 거미는 애벌레가 말을 더 하기 전에 재빨리 허리에 독침을 꽂았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먹이를 거미줄로 칭칭 감았습니다.

이젠 웬만한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게 말이지요. 그것도 모르고 아기 바람은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이상하네? 내가 무엇을 도울 수 있다는 거지? 곁에 제 엄마가 저렇게 다 해주는데 말이지. 그런데 저 애벌레는 누에와 달리 꽤 아파하네?” 아기 바람은 나중에 저 고치에서 얼마나 예쁜 벌레가 나오나 싶어 그 위치를 자세히 봐두었어요. 사실 거미의 모습은 아기 바람이 보기엔 너무 무서웠거든요. 산 너머 조금 더 놀러가려고 몸을 부풀리려는데 문득 엄마 바람이 다가왔습니다.

“어디 갔었니? 너를 찾느라고 온 골짝을 다 뒤졌잖아. 그렇게 혼자 돌아다니다 길을 잃으면 넌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돼. 지금이야 튼튼한 네 엄마 덕분에 네가 지나가면 나뭇잎이 박수를 치며 손을 흔들어주고 풀들이 네게 절을 하지만 말이야. 우리들은 한데 몰려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엄마? 고치는 엄마가 대신 지어주기도 하나요? 저기 숲 속에서는 커다랗게 생긴 벌레가 아기 애벌레의 옷을 입혀주던데요?” “응? 어디 보자. 음! 그건 네가 잘못 안 거야. 그건 거미가 애벌레를 자기 먹잇감으로 잡아먹으려고 준비하는 거야.” “예? 그럼, 그것은 그 애벌레가 고치를 짓는 게 아니었나요? 아, 나는….”

아기 바람은 애벌레의 죽음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며 몹시 슬펐습니다. ‘그래, 그때 내가 세게 불었다면 거미줄을 끊을 수 있었을 텐데.’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어서 아기 바람은 이제부턴 스쳐 가는 여러 가지 일들의 의미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어요. 며칠 후 다시 작은 집 앞을 지나가다 아기 바람은 누에가 궁금해졌습니다. 열린 문으로 살그머니 들어가 보니 누에들은 한창 고치를 짓고 있었어요. 누에들을 보는 순간, 아기 바람은 불쑥 그들을 놀려주고 싶은 심술이 들었습니다.

“너희들 참 열심히 고치를 틀고 있구나. 밖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고치 속에선 끄덕도 없겠구나.” “…” “그런데 너희들이 짓고 있는 고치가 너를 안전하게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니?” “무슨 말이니?” “음, 그러니까 말이지, 너희들이 짓는 고치 실이 사실은 너를 꽁꽁 묶어두기 위한 거미줄인 줄 아니?” “하하, 말도 안 돼. 내가 치는 이 고치가 어찌 거미줄이니?” “글쎄 그럴까? 네가 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가 네 입을 빌어 너를 싸고 있는 걸. 내 눈엔 그 거미가 보이는데.”

아기 바람은 짐짓 심각한 척 거짓말을 했습니다. “뭐라고?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 거미가 우리를 잡아먹으려 한다고?” “뭐? 진짜니? 그렇다면 큰일났네, 큰일났어!” 고치 트는 것을 멈추고 누에들이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미처 고치를 다 틀지 못한 누에들의 몸이 서서히 굳어지는 것이었어요. 무심코 한 말이 이토록 누에들에게 충격을 주다니, 아기 바람은 놀라서 자신의 말을 취소하려고 다시 누에들에게 다가갔지요.

그때 벌컥 농부가 들어왔습니다. 농부는 고치를 짓다가 멈춘 누에들을 둘러보곤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이런!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더니 못된 바람이 누에들을 감기 들게 했구나.” 농부는 얼른 문을 닫고 방안에 따뜻하게 난로를 피웠습니다. 그러자 아기 바람은 움직일 수 없고 나른해져서 정신이 몽롱해졌어요. 그제야 갇힌 바람은 스스로를 고치 속에 가두려고 힘써 온 누에들의 용기를 생각하며 심술을 부린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했습니다. 방안이 따뜻해지자 하나둘씩 누에들은 굳은 몸을 풀며 다시 고치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구나. 우리가 열심히 만들고 있는 고치 집이 거미줄일 리가 없지. 누구보다 튼튼히 내 힘으로 집을 짓고 있는데 말이야.” “그래, 그래.” “그렇지만 말이야, 바람이 거짓말 할 리가 없어. 바람의 말대로 우리가 싸여있는 것이 고치가 아니고 거미줄이라면 빨리 빠져 나와야 하잖아. 그대로 있다간 거미 밥이 된다 말이야. 늦기 전에 이 질긴 줄을 끊어야 해.”

몸이 풀린 누에 한편에서는 이런 말을 하며 짓다만 고치를 다시 입으로 녹이려는 누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녹이려고 애쓰는 누에 입에서 나오는 실은 오히려 어중간한 껍질막이 되어 점점 더 고치의 모습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이었어요.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리며 농부가 들어왔습니다. “음, 다시 방안이 따뜻해졌군. 그리고 누에들이 다시 고치를 잘 틀고 있구먼.” 흐뭇하게 방안을 둘러보다가 한쪽 끝에 이상하게 고치를 짓다가 굳어있는 누에를 발견하곤 농부는 혀를 끌끌 차며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농부가 다시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쏜살같이 밖으로 빠져나온 아기 바람은 쓰레기더미에 버려지는 누에들을 보며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 혼이 났네. 혼자 다니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로구나. 내가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바람에 애꿎은 누에가 죽게 되다니….’ 문밖에선 엄마 바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엄마 바람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하다가 그냥 아무 말 없이 아기 바람을 안고 골짜기를 넘어갔습니다. 엄마 바람에 안겨 기운을 차리자 아기 바람은 다시 누에 생각이 났습니다. 그 집 속의 누에들이 무사히 어른벌레가 되었는지 몹시 궁금해졌지요. 다시 바람은 엄마 눈을 피해 살며시 산 아래 작은 집으로 갔습니다. 가는 길이 언뜻 생각나지 않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아기 바람은 소나무 숲을 지나치면서 벌레들이 솔잎을 갉아먹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밖에서 자라는 누에도 있구나. 저 누에는 저렇게 뾰족뾰족한 잎을 먹고 온 몸에 가시를 세우는구나.’ 털이 숭숭 난 것이 몹시 사나와 보였지만 아기 바람은 전에 있었던 일을 사과할 겸 다정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안녕? 누에들아. 전에는 참 미안했어. 나는 그냥 장난삼아 놀려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어쩌면 밖에 있던 너희들이 잘 모르는 일이겠지만….” “응? 지금 나한테 한 말이니? 음, 나는 누에가 아니야. 솔잎만 먹는 송충이지. 난 지금 햇볕을 쬐며 쉬고 있어. 귀찮게 하지마.” “송충이? 그래서 모습이 좀 다르구나. 난 그렇게 길쭉하면 다 누에인줄 알았는데….” “하하하, 우리는 곧 어른나방이 될 거야. 이 산엔 먹이가 너무나도 많이 있어. 태어나서 다시 온 산의 소나무에 알을 낳아도 먹을 만큼 많은 솔잎이 있지.” “그래, 너희들은 좋겠다. 그런데, 너희들은 무슨 좋은 일을 하니?” “좋은 일이라니? 그냥 먹고 놀다가 죽는 거지, 무슨 좋은 일?” “이상하다? 누에들은 좋은 실과 비단을 만들어 사람들이 입을 옷을 만들어주는 일을 한다는데?” “누에들이 좋은 일을 한다고? 흥! 좋은 일을 하면 뭣해. 자기는 죽고 마는데.” “으응? 그게 무슨 말이니? 누에가 죽는다고?” - 다음 호에 계속


* 동화작가이면서 나라신경외과 원장인 조현열 님은 200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작품집으로 《불을 잠시 꺼 보렴》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