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6일 연중 제32주일 : 마태 25,1-13
김기환(미카엘) 신부, 두류성당 보좌
1 “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늘 나라에서 당신과 영원히 행복하게 함께 살고픈 희망(希望)으로 가득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버지! 저희는 하늘 나라에서 당신과 영원히 행복하게 함께 살고픈 희망(希望)으로 가득합니다. 이 희망의 다른 이름은 사랑입니다. 당신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Deus Charitas Est). 당신 사랑으로 저희 영혼에 단비와 같이 성자(聖子)의 말씀을 내려 주시어 자라게 하시고 가꾸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사랑의 희망이 이루어지니, 그 때와 그 곳은 다름 아닌 혼인잔치입니다. 그대를 사랑하여 그대와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아름다운 약속(約束)이 이루어지는 때이며 온 마을이 기쁨으로 용약(踊躍)하는 곳. 그렇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주님이시여! 당신의 비유는 진정 탁월(卓越)합니다!
그 혼인잔치의 신랑(新郞)은 주님이시요, 신부(新婦)는 교회입니다. 머리는 그리스도이시요, 교회는 그 지체(肢體)이듯 당신께서 교회의 주인이시고, 저희는 당신의 사랑을 받아 순결한 배필(配匹)이 됩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는 신부의 친구들입니다. 즉 교회에 몸담고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여 교형자매가 된 저희들입니다.
당신 말씀의 열 처녀 중 다섯은 슬기롭고 나머지 다섯은 어리석습니다. 당신께서 사람의 숫자를 세려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희는 압니다. 당신 말씀은 하늘 나라에 딱 절반이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선택(選擇)의 때가 다가왔다는 말씀이실 것입니다. 이 선택은 경쟁(競爭)은 아니나 긴박(緊迫)하며, 눈에 보이는 것은 많으나 길은 단 두 갈래입니다. 이 긴박한 선택의 두 갈림길은 하느님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음과 슬기로움 역시 이를 증거(證據)하는데, 시편과 잠언에서도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초라 노래하고 어리석은 이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 합니다.
주님, 저희 모두는 부족하나마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당신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찬송합니다. 당신께서 십자가로 저희를 구원하셨음을 압니다. 열 처녀 모두 등잔을 가지고 있었듯, 저희 모두 당신의 이름을, 창조를, 구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등잔을 채울 기름이 부족합니다. 기름은 오직 당신께만 매달리는 어린이와 같은 신앙(信仰)이 아닙니까? 그 기름은 오직 그 기름은 오직 당신만이 저희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신다는 신부(新婦)와 같은 신앙이 아닙니까?
주님! 저희는 신앙이 부족합니다. 저희를 신앙으로 채워주소서. 당신께서 다시 오실 그 때에 깨어있을 수 있도록 저희를 이끌어주소서. 언젠가 반드시 주님의 때가 올 때 이 세상의 주인, 바로 당신이심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바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이 오신다. 주님을 맞으러 나가라!”하고 세상이 외칠 것입니다. 그 때 저희가 당신을 맞으러 한달음에 뛰어나가게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의 영혼을 신앙으로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께서 오실 그 때 그 결정적인 시간에 남에게 기댈 생각, 인간적인 계산과 궁리를 하는 어리석음에서 저희를 보호하소서. 저희에게 슬기로운 신앙을 채워주시어 오직 주님만 생각하며 당신의 결정적인 때를 놓치지 않게 하소서. 마침내 문이 닫히고 하느님의 나라는 완성(完成)될 것입니다. 그 완성은 그야말로 완전(完全)한 것이어서 다시 그 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한 완성을 향한 저희의 열망을 굽어보시어 저희를 당신 나라로 이끌어주소서. 저희가 깨어있게 이끄소서.
하느님 아버지,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하늘 나라가 영원한 행복의 종착역(終着驛)임을 저희가 늘 기억하게 하소서. 또한 아무도 모르는 그 날과 그 시간을 희망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당신께서 다시 오신다는 분명한 믿음으로 저희 영혼이 가득하게 하소서.
11월 13일 연중 제33주일 : 마태 25,14-30 또는 25,14-15. 19-21.
사공병도(베드로) 신부, 동촌성당 보좌
14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16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17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19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2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4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26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2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우리는 또 다시 엠마오 길을 걷습니다. 오늘은 제법 먼 길이 될 듯합니다. 하지만 이 길에서 그분을 다시 뵐 수만 있다면 이보다 곱절이 멀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오늘도 이 길 위에서 당신을 마주 뵙고 가슴이 뜨거워지길 바라며 성령께 청을 올립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는 지금 일엽편주에 몸을 맡긴 채 망망대해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내 하느님 현존의 오랜 표지인 성전이 무너지리라는 암울한 예언으로 어둠이 누리를 엄습합니다. 아직 발 디딜 땅을 찾지 못했기에 이 어둠이 너무나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어둠 너머 “마지막 날”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며 그 날에 대해 감히 여쭈어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저 멀리서 조그마한 불빛이 번쩍이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입니다.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불빛들…. 보아하니 등댓불인 것 같습니다. 그 불빛들이 우리에게 “마지막 날 하늘 나라는 이와 같다”며 제각기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빛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그 불빛이 말하길 주인이 곧 우리를 떠나 여행길에 오르신답니다. 이제 저 불빛을 향해 우리의 뱃머리를 돌려봅니다.
얼마를 전진했을까요? 불빛이 다음 신호를 보내줍니다. 주인이 여행길에 오르면서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세 명의 종들에게 각각 다섯 탈렌트, 세 탈렌트, 한 탈렌트를 맡겼더랍니다. 한 탈렌트면 육천 데나리온, 한 데나리온이 하루 임금이니 한 탈렌트면 11년 치 임금입니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금액을 종들에게 선뜻 맡기는 걸 보면 주인의 배포가 엄청나게 크거나 종들을 깊이 신뢰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누군가에게는 다섯을 주고 누군가에게는 셋을 주고 또 누군가에게는 하나를 주었을까요? 혹시 주인이 종들을 편애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직은 풀리지 않는 이 수수께끼를 품고서 계속 전진합니다.
다시 얼마를 나아가니 불빛이 또 다른 신호를 보내옵니다. 이번에는 주인이 아닌 종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인을 닮아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본래 사업수완이 좋은 건지…. 다섯 탈렌트와 세 탈렌트를 받은 종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가서 받은 재산을 두 배로 불려옵니다. 이러한 그들의 행보에는 주인의 재산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과연 무엇이 그들을 이리도 용감하게 만든 것일까요? 혹시 그 용기란 것이 ‘선견지명을 지니신 우리 주인님이 시키셨으니 분명 성공할 거야’, ‘혹여 재산을 손해 보더라도 주인님은 괘념치 않으실 거야.’라는 주인에 대한 굳건한 신뢰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은 용감한 두 종들과는 달리 물러나와 받은 재산을 몽땅 땅에 숨겨둡니다. 잔뜩 겁에 질린 듯한 이 종의 모습은 다른 두 종들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어디선가 불어오기 시작한 순풍에 몸을 맡긴 채 몇 번의 파도를 넘습니다. 그러자 저 앞의 불빛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드디어 주인이 돌아온 것입니다. 주인에게서 받은 재산을 두 배로 불린 두 종들은 어서 나와 자신이 번 모든 것을 주인에게 온전히 바칩니다. 사실 두 종 모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기에 그 동안의 수고에 대한 대가로 번 돈의 일부를 자기 주머니에 넣어도 무방할 텐데…. 이 두 종들은 용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충실하기까지 합니다. 이렇듯 충실한 종들이 사랑스럽지 않을 주인은 분명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주인은 충실한 두 종들에게 자신과 함께 기쁨을 나눌 것을 명합니다. 아무리 총애하더라도 고작 종에 지나지 않는 이들이건만 주인은 과분하게도 자신과 같은 위치에 그들이 서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다섯 탈렌트를 받고 다섯 탈렌트를 더 벌어온 종이나 세 탈렌트를 받고 세 탈렌트를 더 벌어온 종이나 똑같은 칭찬과 똑같은 보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명의 종들에게 서로 다르게 재산을 나누어주었던 주인의 의중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본디 주인은 재산을 불리는데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종들이 지닌 충실성에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주인은 평소에 자신이 지켜봐왔던 종들의 됨됨이와 수완에 따라 그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을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주인은 양이 아니라 질을 보고자 하였던 것이고, 따라서 각기 받은 재산을 두 배로 늘려온 두 종들 모두 주인에게 똑같은 평가와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충실한 두 종들과는 달리 받은 재산을 땅에 묻어두었던 종은 받았던 그대로를 가져다가 주인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종의 변명 속에는 주인에 대한 두려움과 경멸 그리고 불신이 가득합니다. 이는 종들에게 자신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기꺼이 맡겼던 주인이나 주인에 대한 깊은 신뢰심으로 거침없이 받은 재산을 활용하였던 두 종들과는 너무도 상반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그 불충한 종이 뱉은 말 그대로 그를 모질게 어둠 속으로 쫓아내버립니다. ‘만약 이 종에게도 두 종들과 같은 주인에 대한 신뢰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러한 파국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라는 마지막 여운이 바람과 함께 우리를 스쳐지나갑니다.
바람이 그치고 드디어 등댓불이 안내하는 목적지에 이르렀습니다. 대지에 첫 발을 내딛자 저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합니다. 서광이 비치는 바다를 향해 우리가 왔던 길을 되돌아보니 깜짝 놀랄 만한 광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단지 불빛을 따라 곧장 전진했을 뿐인데 우리가 왔던 바닷길을 제외한 모든 곳에 크고 작은 암초들이 가득하니 말입니다. 만약 한순간이라도 불빛에 대한 의심으로 키가 흔들렸다면 우리의 항해는 이처럼 무사히 끝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새삼스레 달라 보이는 저 하늘을 향해 연신 감사를 드리며 굳은 신뢰 또한 마음 속으로 갈무리합니다. 그렇게 오늘의 이 길을 마무리해봅니다.
11월 20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 마태 25,31-46
고태권(그레고리오) 신부, 동천성당 보좌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찬미예수님!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며 교회가 들려주는 복음은 예수님 재림 때의 최후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이비(似而非) 혹은 이단(異端)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몰아넣거나, 요한묵시록을 근거로 하여 구원 받을 사람들을 숫자상으로 한정지으려 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을까요? 오늘 복음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확실한 두 가지
첫째,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때에 왼편과 오른편을 가르실 것입니다. 심판의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것은 당신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당신 오른편에 서 있을 이들과 왼편에 서 있을 이들을 가르신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심판의 때에 예수님께서 왼편과 오른편을 가르신다고 말씀드리면 무서워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무섭게 하시려고, 당신이 다시 오실 때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사랑의 주님께서는 분명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오른편에 서 있는 삶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른편에 서 있을 이와 왼편에 서 있을 이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심판의 기준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요. 바로 우리가 사랑의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잘난 사람들이 아닌 작고 소외된 이들 중에서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심판의 기준을 나중에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미리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러니까 그분께서는 우리가 구원 받기를 원하시고, 구원의 길은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그리고 미리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바로 ‘정답을 미리 알고 문제를 풀어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여야 하는 것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 복음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이 다시 오시는 때를 두려워 하거나 겁먹지 말고, 당신이 다시 오셨을 때에 당신 오른편에 앉아서 당신이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하신 나라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작고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함께 더불어 살라는 것이지요. 숫자로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에 따라 결정되는, 열려 있는 심판일 것입니다.
혹시 지금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힘이 드십니까? 사랑하는 자신이 바보 같다고 느껴지십니까?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하는 것이 손해 보는 것 같으십니까? 힘을 내십시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아, 내 딸아! 내가 눈여겨보고 있다. 내가 마지막 때에 너희를 내 오른편에 서게 할 것이다. 꾸준히 사랑하여라! 그리고 내 아들아, 내 딸아!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해 마련된 그곳에서 나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자.”(마태 25,34; 46)
11월 27일 대림 제1주일 : 마르 13,33-37
허진혁(바오로) 신부, 삼덕젊은이성당 보좌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5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신학교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마산교구의 정하권(플로리아노) 몬시뇰께서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학장으로 계실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학장님께서 신학생 기숙사에 깜짝 방문하셔서 신학생들이 사는 방을 하나하나 직접 둘러보셨다고 합니다. 어떤 방은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는 방도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신학생들의 방은 개인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일종의 수련 공간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갑자기 들어올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아마 당시의 신학생들도 방에서만큼은 좀 편하게 해놓고 지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학장님께서 방을 모두 둘러보시고 나서 신학생들을 성당으로 모두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방을 들어가 보면 그 사람의 지금 삶의 모습, 내면의 상태를 알 수 있다. 방이 어지러운 사람은 마음이 어지러운 것이니, 신학생의 삶에 합당하지 않다.”
그 뒤로 신학교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마치 군대에서 모포에 각 잡듯이 방을 반듯하게 정리하고 청소했겠지요. ‘늘 깨어 있어라.’는 신부님의 교훈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정리할 시간을 주지만 하느님이 언젠가 우리 앞에 나타나실 그때는 정리할 시간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이 전설(?)같은 이야기를 듣고는 아침에 제일 먼저 일어나서 이부자리부터 정돈하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늘 준비되어 있는 깨어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었지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 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성실함은 일반 사회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지만,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해보면 신앙적으로는 더더욱 중요한 삶의 태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성실하다’는 것이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자신의 소임을 묵묵하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구원은 한마디로 성실한 사람의 몫임에 틀림없습니다. 한결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성소와 과업에 충실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방문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때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평소의 내 삶, 지금 내 삶의 모습 그대로 나는 판단 받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봅시다. 구원받을 만한 사람은 누구인가 말입니다. “그 사람은 안 봐도 지금 그거 하고 있을 거야. 알아서 잘 할 거야.”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 구원에 가까운 사람이 아닐까요? 그리고 지금 나의 모습을 한번 둘러봅시다. 과연 있어야 할 시간에,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당장 구원받을 만한 사람입니까? 우리 모두 성실한 사람이 됩시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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