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광역시 서구 새방골은 대구시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와룡산 동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지금의 새방골성당과 죽전성당 구역 일대이다.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언제부터 살았는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형상으로 와룡산 밑의 외딴 마을이라는 점과 대구 읍내와 떨어져 있다는 이점으로 인해 박해 때 피난지로 적합했던 곳으로 1850년대부터 신자들이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새방골의 복음 전파 과정
병인박해 후 대원군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 조선은 일본과 통상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했다. 조선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후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과 수교를 맺었고, 1866년에는 프랑스와 조불수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제한적이지만 종교활동이 자유로워졌다. 이때 조선교구를 담당한 파리외방전교회는 신앙의 자유가 이루어질 것을 예견하고 선교사들에게 각 지방을 맡겨 선교하도록 했다.
1882년부터 경상도 지방을 비롯한 충청도, 전라도 일부를 순회 전교활동을 펼치고 있던 로베르(한국명 : 김보록) 신부는 1885년 말 칠곡 신나무골에 대구 최초로 사제관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경상도 지역을 사목했다. 이 시기를 대구본당(현 계산주교좌성당)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로베르 신부는 대구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1888년 11월 새방골의 이장언(프란치스코) 집에서 기거하며 대구 읍내와 새로 생겨나고 있는 공소들을 순방하며 성사를 주었다.
 
새방골 교우촌의 형성
새방골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았는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1837년 서울에서 칠곡 신나무골로 낙향한 김현상(요아킴) 가정이 1839년 기해박해 전후에 칠곡 한티로 이사를 가서 살다가 1850년대 새방골에 정착했다. 이후 김현상의 딸 아가다가 아들 서상돈(아우구스티노)과 상정을 데리고 1859년 새방골로 이주해왔다. 이듬해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칠곡 동명 어골(송산동)에 살던 이장언과 부친 이재영(고스마) 가정이 새방골로 피신해서 살게 되었고 그후 일가 친척들이 대를 이어 살아가게 되었다.
로베르 신부와 새방골
로베르 신부가 새방골에 기거할 때에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아 비밀리에 머물면서 낮에는 출입하지 않고 밤에 상복을 입고 대구의 동산, 새터, 날뫼, 남산(현 계산동) 등의 공소를 다니면서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주는 등 전교활동을 함으로써 신자가 늘어났다.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의 권고로 로베르 신부는 신나무골과 대구지역에 서당과 비슷한 형태의 학교를 두 곳 세워 교리와 한글을 가르쳤다. 1889년~1890년 사목보고서에 “마지막으로 블랑 주교님이 추천한 대로 외교인들이 모르게 두 곳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몸을 숨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는 각각 10명의 학생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조금씩 좋은 열매가 맺히리라고 믿으며 몇 년 후에는 수확이 더욱 풍성해지리라 기대합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 새방골 교우촌 방문
1893년 11월 9일~16일까지 대구의 남산과 새방골 교우촌을 방문한 뮈텔 주교는 견진성사를 주고 교회 현황을 둘러보았다. 뮈텔 주교는 일기에서 “11월 16일 말을 타고 들판을 가로질러 10리를 가니 죽전마을이다. 이 마을은 와룡산 발치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신자 가정들 중 하나는 예전에 죠조 신부의 복사를 지낸 이장언의 집이다. 이 프란치스코는 여덟 살 난 아들과 네 명의 딸을 두고 있는데 딸 중 한 명이 수녀원에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다. 기꺼이 그의 딸을 서울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새방골 교우촌 일대에는 현재 새방골성당과 죽전성당이 들어서 있다. 현대화의 발전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린 새방골 교우촌은 역사 속에 그리고 현재의 신앙 안에 살아 숨쉬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 지금까지 <대구대교구 성지를 찾아서>를 애독해주신 여러분과 감수를 맡아 주신 서준홍(마티아)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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