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병원사목을 하며
병원사목 체험기


이진호(안토니오)|신부, 교구 병원사목팀

 

지난 9월에 병원사목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아는 신자들마다 “가톨릭병원에 계세요?”, “어떤 일을 하세요?”하고 물어온다. 그럴 때마다 같은 대답을 여러 번 했다. 현재 교구내의 병원에 사목자가 파견된 병원은 가톨릭 계통의 병원(교구나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병원들)과 일반병원(경대병원, 영대병원, 대구의료원, 노인요양원 등)이 있다.

가톨릭계통의 병원들은 병원마다 해당기관에서 원목신부를 직접 발령하고, 일반병원은 교구의 일반병원사목팀 신부들(현재 3명)이 공동으로 원목하고 있다. 현재 일반병원 원목팀에서 원목하고 있는 병원은 12개인데 그중에 내가 맡고 있는 병원이 4개(경북대학병원, 보훈병원, 중앙노인병원, 시지노인병원)이다.

원목활동(병원사목을 대개 원목이라 하고, 병원사목자를 원목자라고 함)은 주로 성사배령(병자성사, 봉성체) 방문기도, 면담, 미사 등이고, 병원봉사자(원목봉사자와 일반봉사자)와 병원신우회가 있는 병원은 그들도 사목한다. 현재 보훈병원과 경북대학 병원은 원목수녀, 봉사자, 신우회가 구성되어 있고, 시지노인병원은 원목수녀와 신우회, 미사봉사자가 있고, 중앙노인병원은 미사봉사자가 있어 도와준다. 경북대학 병원과 보훈병원은 주 2회, 시지노인병원은 월 2회, 중앙노인병원은 월 1회 원목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겠지만 환자를 돌보고 도와주는 일은 좀 더 의미심장한 것 같다. 환자라는 신분은 질병이라는 반갑지 않은 현실이 만들지만, 질병은 여러 가지 해결해야할 문제들을 동반한다. 당장 육체적인 치료와 새로운 환경에의 적응이라는 외적인 문제와, 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극복해야하는 여러 가지 내적인 문제에 동시에 직면하게 된다. 외적인 문제들은 병원관계자들과 가족들, 사회인들이 도움을 주지만, 내적인 문제는 전적으로 환자 스스로 감당하고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원목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환자가 직면한 내적인 문제는 다양하지만 가장 크게 드러나는 것이 두려움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불안, 초조, 긴장, 공포, 스트레스 같은 또 다른 노이로제 현상들을 동반한다. 그래서 환자는 육체의 질병과 함께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함께 감당해야하고, 신자들은 더하여 죄와 벌에 대한 영적고통까지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환자에게는 이를 도와줄 최소한의 전문인이나 이들과 함께 연민할 수 있는 협력자가 필요하다. 원목자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참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목말랐을 때에, 나그네 되었을 때에… 병들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 31 이하 참조)

원목자는 모든 환자를 사랑과 연민으로 대하고 그들을 영적으로 돌보고 도와주어야 한다. 외적으로 드러난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내면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헤아려 주어야 한다. 그래서 원목을 “영적돌봄”이라고 한다. 영적돌봄은 환자를 자주 만나고 그들의 말을 ‘공감’, ‘경청’하면서 ‘지지’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원목은 일반사목과 다르다.

그런데 실제 원목일선에 나서다 보면 가끔씩 일반사목으로 넘어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몸이 피곤 할 때는 여러 가지 이유로 게으름을 피우거나 성실하지 못할 때도 있다. 특히 기관지가 약한 탓으로 호흡기 병동을 다녀오면 며칠씩 기침, 가래로 고생도 한다. 온 병동을 돌아야 하는 봉성체는 고장 난 다리를 더 아프게 한다. 무례하거나 당연한 듯이 권리를 주장하거나 떼를 쓰는 보호자를 만나면 살짝 짜증도 난다. 아무 준비도 없이 혹은 의미도 모르면서 부적처럼 요청하는 성사배령에는 황당하기도 하다.

 

그러나 행복할 때가 훨씬 더 많다. 식사도 미루고 원목자를 기다리는 할아버지,  신부 손을 붙잡고 연신 볼에 비벼대는 할머니, 불편한 허리도 잊고 벌떡 일어나 앉으며 신부를 맞이하는 아주머니, 고맙다고 연신 절을 해대는 아저씨, ‘신부님이 병실에 오셨다.’고 마냥 좋아하는 어린이, 전신마비로 누워있지만 눈웃음으로 대화에 응해주는 젊은이, 너무 고통이 심해서 괴롭다고 숨죽여 우는 덩치 큰 남자, 죽음을 절감하고 애절한 눈빛으로 신부를 바라보던 어르신, 기도 몇 번에 황송해 하는 보호자 등…. 원목신부를 만나고 함께 한 것만으로도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어린이 같은 영혼들을 마주하는 행복은 다른 묘미가 있는 것 같다.

바오로관에 함께 거주하시는 이○○ 신부님은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힘들제? 애 묵는다. 그래도 보람 있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하고, 인생의 마지막 길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제일 보람 있는 거 아이가!”
그렇다. 이 일은 보람이 있다. 의미 있고 가치가 있다. 그래서 재미도 있다. 배움도 있다. 오늘도 병원에서 인생을, 세상을, 신앙을, 진리를 배운다. 병원은 또 다른 교회이다. 또 다른 학교이다. 애절함과 경험에서 묻어나오는 살아있는 학교, 부활을 배우는 축복의 교회이다.
 
“너희가 내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내가 병마를 이겼다. 자, 이제 다음 침상으로 가자!” 치유자이신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세세 영원히 받으소서!


* 지금까지 <병원사목을 하며>를 애독해 주신 독자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