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성사론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성사론은 개신교회와의 논쟁 속에서 더 다듬어지게 되었지만 그 스콜라적인 전통은 여전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회론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시 성사론 안에도 그리스도중심적인 경향이 남아 있었고, 성령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말이 없었던 것이다. 성사론의 관심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통한 성사의 제정문제와 성사의 집전자와 수령자 그리고 유효성을 위한 조건들과 성사들이 작용하는 방식들에 있었다.
성령에 관한 일반적인 고찰들은 특별히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에 관한 가르침 안에서만 보일 뿐이었다. 예를 들어 G. L. Hahn의 성사론에서 ‘성령’이라는 개념은 색인(Index)에는 나타나도 목차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 J. Brinktrine의 성사론은 성령의 선물과 (성사들과 견진성사를 통한) 성령의 중재는 다루지만 성령에 관해서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와 연관해서만 이야기 할 뿐이며, 색인 안에서도 ‘성령’은 보이지 않는다. F. Diekamp의 성사론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데, 주목할만한 것은 ‘성령’이라는 개념이 세례와 견진을 다룰 때만이 아니라 고해성사에 관한 가르침의 영역에서도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은 어디까지나 ‘성령칠은’이라는 관점에서만 그리고 성품성사 안에서는 “Accipe Spiritum Sanctum(성령을 받으시오.)”라는 전례적인 언명과 더불어 성령의 시여(施輿)와 관련하여서만 언급될 뿐이다.
서방교회의 신학은 견진성사 말고는 대부분 성령에 관한 언급 없이 성사들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성사론은 트리엔트 공의회와 스콜라적인 전통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 몇 가지 새로운 점을 보인다. 예를 들어 튀빙엔 학파의 J. A. M hler (1796-1838)는 성사를 신앙의 수용을 위한 그리스도 구원업적의 선물로 파악한다. 그는 종교개혁적인 입장과의 생산적인 논쟁 안에서 전통적인 성사론에 새로운 강조점을, 경우에 따라서는 이전의 강조점을 두고 해설한다. 성사는 우리에게 구세주의 공로로 얻은 신적인 힘을 전해주는데, 이 힘은 그 어떤 인간적인 기분과 정신적인 상태를 통하여서도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힘은 그리스도의 뜻 때문에 하느님 홀로 성사에 주시는 것이다. 사람은 이 선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감수성이 있어야만 한다. 이를테면 이는 죄악에 대한 후회와 아픔, 신적인 도움과 신뢰가득 찬 믿음 안에서 나타난다.
또한 M.-J. Scheeben(+1888)은 성사론의 영역 안에서 성령과 관계한 숙고를 전개한다. 그는 성사의 효과와 원인을 강조하는 스콜라 전통과 함께 다시금 옛 전통의 요소를 부활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성사는 성령활동의 신비이다. 성령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사 안에서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신적인 생명에 참여하도록 한다. 이렇게 성사는 신비가 되는 것이다. 성령활동에 대한 Scheeben의 특별한 강조는 동방교회의 전통만이 아니라 칼빈적인 성사이해의 요소에까지 확대된다.
성령에 관한 이러한 사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성사론 안에서 일반적으로 많은 반향을 얻지 못한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비로소 가톨릭 성사론 안에서 새로운 신학적인 성향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O. Casel(1886-1948)은 성사에 관련된 성령에 관한 많은 성찰을 보인다. 교회는 영을 지니고 운반하는 자로서 성사를 위한 구체적인 환경을 여는데, 성령께서는 이 구체적인 환경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이다.
4) 현대의 성사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성사론은 이전의 교도권적인 가르침에서 보이던 성사와 그 은총에 대한 개인주의적이고 물질적인 관점보다 성사의 교회적인 국면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교회는 그 자체로 심지어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사로,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교회헌장 1)로 나타나는 것이다.
공의회 이후의 시기의 성사론에는 성령에 관한 숙고가 더 많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A. Kirchg sner의 ‘전례 안에서의 하느님의 영’이라는 책은 목록 안에서 성령에 관한 다음의 글들을 싣고 있는데, ‘성령 안에서’, ‘영의 열매들’, ‘사랑의 영’, ‘진리의 영’, ‘생명의 영’, ‘자유의 영’, ‘계몽의 영’, ‘영의 가시적인 주재(主宰)’가 그것이다. Th. Schneider(편)의 ‘교의학 해설서’에 있는 교회론의 색인은 ‘영’, ‘성령’, ‘프노이마(Pneuma) : 선물로서의 영’, ‘은사(Donum) : 영을 맞아들임’과 같이 더 분명한 성찰을 보인다. J.-M. R. Tillard 또한 성사 안에서의 성령의 선물을 언급하고 있다. : “성사는 전적으로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부터 살아간다. 성사는 성령의 힘을 통하여 완성되며 그분의 선물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성사는 오직 성령 안에서만 거행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백성 사이의 끈이시기 때문이다. … 교회의 성사는 우리가 그 안에서 성령의 선물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령의 선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성사 안에서 또 성사를 통하여 부활사건을 체험한 공동체에 다다르기 때문에 성령의 선물인데, 이 부활사건은 회상의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상징적인 표현 안에서 현존한다.” 이와 같이 L. Lies도 자신의 성사신학 안에서 영의 파견을 더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만남을 위한 아들과 영의 파견’, ‘영의 파견’, ‘성찬례 안에서의 영의 파견’, ‘영의 파견과 위격 안에서의 몸’, ‘영의 파견을 위한 장소로서의 성사들’, ‘영의 파견과 아들의 파견의 일치’ 등이 그 목차의 내용이다.
이제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는 ‘전례 안에서 성령과 교회’라는 제목 하에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신다.” ;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상기시키신다.” ;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실현하신다.” “성령의 친교”와 같은 소제목의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H. Huthe(편)의 ‘성사들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만남(Christusbegegnung in den Sakramenten)’이란 책에는 ‘성령과 성체성사’, ‘성령과 견진성사’, ‘성령과 병자성사’, ‘성령과 죄의 용서’, ‘성령과 세례성사’ 등과 같이 성사각론과 관련한 성령에 관한 많은 고찰이 보인다.
그러할지라도 오늘날 교회론과 성사신학 안에서 성령의 활동에 대한 고찰이 아직 부족한 것은 분명하다. 그에 대한 현대신학의 성과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고자 한다.
이제까지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의 성령의 망각”이라는 제목으로 오랫동안 살펴보았다. 과거에는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 성령에 대한 고찰이 풍부했으나 오늘날에는 부족하다는 내용이었다.
앞으로의 글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의 성령과 교회이해”, “봉사하는 교회의 조력자로서의 성령”, “교회 건설의 협력자로서의 성령”, “교회와 인류를 위한 생명의 원리로서의 성령”, “성사들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 “교회성령이해를 위한 토착화개념으로서의 생명의 힘인 기(氣)”, “기개념의 도움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적인 영이해(靈理解)의 토착화 연구”라는 제목의 고찰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