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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동화
누에와 아기 바람(2)


조현열(토마스 아퀴나스)|성정하상성당, 동화작가, 의사


그때 산 밑에서 문득 나무꾼 아저씨가 다가왔습니다. “어허, 이 소나무엔 유독 송충이가 많네. 이 송충이 때문에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 내가 벨 나무가 없어지잖아. 저 아랫마을의 뒷산도 송충이들 때문에 나무가 죽어 벌거숭이산이 다 되었다는데 이 산도 그렇게 되기 전에 부지런히 송충이를 잡아야겠어.” 나무꾼은 지게를 내려놓고는 작대기를 쥐고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송충이를 털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으악, 살려줘!” “아, 아니야. 내가 가지를 흔드는 게 아니야, 송충아. 그런데 누에가 좋은 일하다 죽는다는 게 무슨 말이니?” 안간힘을 다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송충이에게 아기 바람은 또 물었지만 정신없는 송충이가 대답할 리 없지요. 나무꾼은 긴 가지를 꺾어 집게를 만들고는 잘 떨어지지 않는 송충이를 하나씩 잡아냈습니다. 그리고는 한 곳에 모아 불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기 바람은 깜짝 놀랐어요. 잠시 만났지만 자기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한 송충이를 불에 태워 죽이려 하다니, 아기 바람은 송충이가 죽는 게 또 자기 탓인 것 같아 힘껏 힘을 모아 달려가 불을 끄려 했습니다.

“음, 마침 바람이 알맞게 부니 불이 잘 타는구나. 고맙다 시원한 바람아.” 끄려고 했던 불이 더 잘 피자 아기 바람은 몹시 당황하여 서둘러 산을 내려왔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말썽만 피울까? 내가 간 곳마다 죽음만 기다리니 말이야.’ 아기 바람은 힘이 빠져 땅위로 슬슬 기어갔습니다. “야! 가려면 곱게 그냥 지나치지, 왜 내 먹이 이파리는 마구 흔드니?”

문득 바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언뜻 아기 바람이 살펴보니 배추밭의 배춧잎에서 연 초록색 애벌레가 꼬리의 붉은 눈을 치켜들고 노려보는 것이었어요. 바람은 뻐끔뻐끔한 배춧잎을 지나면서 햇볕이 부서져 애벌레의 색깔이 바뀌었나보다 생각하고는 좀 망설이다 다정하게 물었습니다.

“너희들…땅에 사는 누에…맞지? 전에는 참 미안했…” “시끄러워! 난 지금 바쁘단 말이야. 다른 친구들은 다 고치를 틀고 있는데 나는 늦었단 말이야. 가까이 오지 마! 배춧잎이 흔들려 떨어질 것 같잖아!” 잔뜩 주눅이 들어 바람은 기어가는 소리로 다시 말했습니다. “배춧잎이라고? 너희들이 먹는 게? 그렇다면 너희들은…누에가 아니구나.” “이제 알았니? 나는 배춧잎만 먹는 배추벌레야. 곧 희고 노란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 거란 말이야. 그런 바보 같은 누에하곤 달라.” “바보라니? 누에가 바보라고? 누구보다 열심히 뽕잎을 먹고 고치를 만드는 누에가 말이야?” “그러니까 바보지. 자기는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한다고 재지만 자기가 죽어야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걸 모르니 말이야.” “너도 송충이와 비슷한 말을 하는구나. 제발 알려줘. 나는 그 누에들에게 큰 빚을 졌단 말이야.”

아기 바람의 간절한 눈빛을 보자 한껏 폼을 잡고 배추벌레가 말해줬어요. “비단실이 그냥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니? 누에고치에게서 얻는단 말이야. 자기가 어른 나방이 되기 위해 고치를 뚫고 나오면 고치를 싸고 있는 실이 다 끊어질 것 아니겠니? 그래서 사람들은 고치가 다 익어 누에나방이 나오기 전에 고치를 삶아버린단 말이야. 그러면 뭐야. 고치 속의 번데기는 죽잖아. 한 번도 나방이 되어 날개를 펴기도 전에 말이야. 누구 좋으라고 그런 짓을 하니? 우리 같은 벌레들은 남들이 가치 있게 여기진 않지만 한껏 행복하게 하늘로 날개를 펼칠 수 있잖아. 제대로 자라기만 하면 말이야.”

아기 바람은 다시 가슴이 아파왔어요. 그렇게 열심히 고치를 짓고도 제대로 날개를 펴보지도 못한 채 죽어야 하는 누에의 삶이 너무나 불쌍하였거든요. 그때였습니다. “앗, 여기도 배추벌레가 있네. 올해는 이놈들이 더욱 극성이란 말이야. 입에 들어가는 채소에 농약을 칠 수도 없고. 마침 바람이 불어 배춧잎 뒷자락이 들추어져서 요놈을 발견하게 된 게 다행이군.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잖아.”라며 농부아저씨는 작은 집게로 배추벌레를 쏙 집어 들어서는 손에 들고 있는 비닐주머니에 넣는 것이었어요. 주머니 속에는 많은 다른 벌레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어! 또 나 때문에 배추벌레가 죽게 되었구나.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줬는데….’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는 아기 바람은  풀이 죽어 더 이상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선가 슬며시 나타난 엄마 바람이 다시 끌어안아 주지 않았더라면 찬이슬이 되어 밤사이 풀밭에서 사라질지도 몰랐지요. 그러나 다음날 다시 해님이 뜨자 아기 바람은 도저히 엄마 곁에 그대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누에들의 불행을 자기 혼자만 알기엔 너무나 안타까웠거든요. 아기 바람은 햇볕을 받자 살며시 골짜기를 벗어나 누에가 자라는 집에 갔습니다. 이번에는 길을 헤매지 않고 바로 찾아갔지요. 마침 집의 창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안녕? 그동안 잘 지냈니? 일전엔 참 미안했어. 그래서 이번엔 진심으로 사과하는 뜻으로 너희들에게 큰 비밀을 알려주려 왔…” “또 촐랑거리며 거짓말을 하는 아기 바람이구나. 이제 제발 좀 조용히 해라.” 마지막 고치뚜껑을 씌우던 어느 누에가 아기바람의 말끝을 자르면서 말했습니다.

“아니, 이번에는 진짜야. 너희들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문제란 말이야.” “…”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고치를 짓니?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짐짓 큰 비밀을 알려주는 모습으로 몸을 한껏 부풀리며 아기 바람이 말했습니다. “…” “내 말 안 들리니? 너희는 고치 속에 갇히면 날개를 펴기도 전에 죽는단 말이야. 끓는 물 속에 담겨져서….” “…”고치들이 아무 대답이 없자 아기바람은 안타까워서 소리쳤어요. “아니? 너희들은 이런 말 듣고도 놀라지도 않니?”그때 어디선가 굵은 목소리가 고치 안에서 들려왔습니다. “그래 바람아, 네 말대로 우리가 고치 속에 갇혀 죽는다고 치자. 그렇다고 우리가 그 순간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도 있니?” “응? 그, 그렇네. 그렇지만 나는 너희들이 그 사실을 안다면 거기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해서….” “…” “왜, 그리고 나서는 또 말이 없니?” “우리들은 바보가 아니야. 우리가 개미누에에서 넉잠누에가 되기까지 그냥 편안히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야. 사람들이 구해주는 뽕잎을 먹고 몇 번의 허물을 벗으면서 때로는 누에라는 우리 자신에게 우쭐해질 때도 있지. 그렇지만 과연 우리가 이렇게 편안히 자라도 되는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생각을 하며 한 겹씩 껍질을 벗는 거야. 첫 잠을 자고 허물을 벗기 전 까맣던 우리 몸들이 조금씩 희게 되면서 말이야.”

그러자 여기저기 고치 속에서 수런수런 앞 다투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씩 허물을 벗을 때는 알을 깨는 새와 같은 기분이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얼른 어른 나방이 되어 하늘을 날아야지 하는 꿈을 갖는 거야.” “그렇지만 우리가 더 이상 어른 나방이 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한 번씩 잠을 자고 허물을 벗을 때마다 조금씩 깨닫게 되지. 네가 일전에 우리를 놀렸듯, 우리 자신도 이 허물껍질이 거미줄 같다고 느낄 때가 많아. 그대로 멈추면 조여서 죽을지 모르는 거미줄에 쌓여 있는 것 같다고 말이야. 우리가 조금씩 변하는 몸짓이 있어야 우리 주위를 둘러싸서 굳어 가는 거미줄이 풀어지고 끊어지는 거라고 생각될 때가 많지.” “우리가 고민하는 것은 우리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듯이 진짜 누에냐 하는 것이야.” “그래, 그래. 우리의 화두는 누에로서 죽는 거야. 그러나 내가 편식하고 있는 이 뽕잎이 뽕잎이 아니라 솔잎이거나 배춧잎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지. 내가 누에가 아니라면 내가 고치를 틀고 그 속에서 그냥 죽으면 안 돼. 송충이와 배추벌레는 저 자신 이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 그 속에서 그냥 죽는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물론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야.”

“내가 스스로 누에임을 인정하고 고치 속에서 온전한 죽음을 맞는 게 그냥 이루어질 것 같니? 아니야. 내가 고치를 다 짓고 그냥 고치 속에서 죽는다고 해도 고치 속에서 내가 번데기로 살아있지 않으면 고치에서 비단실을 뽑을 수가 없어.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끓는 물속에서 삶겨질 때까지 번데기로서 열심히 살아있어야만 훌륭한 비단실이 되는 거야. 어때? 조금은 우습지 않니?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번데기를 최대한 진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내가 고치 속에서 죽을지, 누에씨를 얻기 위해 고치 밖으로 나가는 씨나방이 될지는 알 수 없어. 그건 내가 결정하는 문제가 아냐.” “어떻게 보면 고치 밖에 나온 나방의 모습이 우리 삶의 꼭대기가 아닐지 몰라. 밖에 나온 누에나방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번식을 위한 노력만 하다가 하루 이틀 안에 죽고 말지. 나방의 삶은 그러니까 긴 누에의 삶에 덤으로 끼어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 누에나방이 되기 전 뽕잎을 먹고, 잠을 자고, 고치를 트는 누에의 과정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야. 그러니까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누에의 모습이 진짜 중요하다는 거지.” “그러니까 말이지, 내가 고치 속에서 번데기로까지만 자라고 고치 속에서 그냥 죽든, 고치를 뚫고 누에나방으로 죽든 별 차이가 없는 거야. 스스로 고치를 뚫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고, 그러면서 번데기의 진화는 계속 되는 것이며, 누에나방이 되고 안 되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내가 끓는 물속에서 곧 죽는다는 것을 알아도 나의 삶은 하등의 변화가 없다는 거야. 오직 지금 주어진 이 과정을 끝까지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밖에는….”

저마다의 말들을 마친 누에고치는 그 빛나는 흰색이 더욱 더 짙어졌어요. 고치를 싸고 있는 실이 더욱 질기고 부드러워지고 있는 모습이 틀림 없습니다. 아기 바람은 앞 다투어 이야기하는 누에들의 말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누에가 온전한 누에고치로 익기까지 저토록 많은 고민과 생각을 거쳤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요. 그저 누에들이 주어진 먹이에 배불리 살만 찌우고 잠만 잔다고 생각했던 아기 바람은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그동안 이리저리 헛되이 돌아다니며 보낸 시간들이 자꾸 생각났기 때문이지요. 괜히 생각 없이 남을 괴롭힌 많은 행동도 떠올랐어요. 깊은 생각과 후회로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데 농부가 그때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음, 고치 색깔이 아주 잘 되었군. 바구니를 가져와야겠어.” “아기 바람아, 다시 문이 닫히려고 해. 이 방은 곧 뜨거워질 거야. 저번처럼 갇혀서 혼이 날지도 몰라. 빨리 저기 열린 창문으로 도망가렴.” 오히려 하얀 고치 속에서 바람을 염려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러나 아기 바람은 밖으로 빠져나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날 염려해줘서 고마워. 너희들을 익힐 뜨거운 물을 식히고 싶지만 내 힘으론 안 될 거야. 하지만 나는 몸을 쪼개어 너희들 몸속에 들어갈 거야. 너희 몸을 잠시라도 덮어주는 공기가 되어 뜨거운 김이 너희를 안 아프게 꼭꼭 감싸 안아줄 거야.” “안 돼. 네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주 짧은 시간밖에 안 돼. 그리고 넌 뜨거운 김에 휩쓸려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 걸?” “그래도 괜찮아. 너희들을 그냥 보낼 순 없어.”

농부가 꼭꼭 문을 닫고 물을 끓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윽고 농부가 바구니에 담겨있는 고치들을 끓는 물속에 부으며 중얼거렸어요. “음, 마침 창문을 열어두었더니 바람에 알맞게 고치가 말랐군. 실이 엉키거나 중간에 떨어지지 않겠는 걸. 아마 올해는 좋은 실을 기대해도 되겠어.” 뜨거운 기운이 확 끼쳐왔습니다. 아기 바람은 고치 속에서 잔뜩 웅크린 번데기를 와락 힘주어 껴안았어요. 그리고 미소 짓듯이 번데기의 주름이 벌어지면서 나오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를 들으며 아기 바람은 정신을 잃었습니다. “고, 마, 워.” 밖에는 세찬 바람이 종일토록 집 주위를 휘돌며 불었습니다. 지붕도, 문짝도, 나무들도 다 저마다의 소리로 엄마 바람을 대신해 울었습니다.


* 그동안 좋은 글을 써주신 조현열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