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4일 대림 제2주일 : 마르 1,1-8
이수환(바오로미키) 원평성당 보좌신부
1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2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5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7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대림시기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들은 ‘기다림 그리고 준비’에 대해 많이 묵상하게 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서도 ‘기다림 그리고 준비’가 잘 드러납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러고 나서 세례자 요한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주목해서 보도록 합시다. 그의 역할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사는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다리며 자신을 낮추는 마음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기다림 그리고 준비’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글쓴이의 입장에서) 다른 분들의 삶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제입니다. 사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제의 휴일은 월요일인데 어느 월요일(이 글을 쓴 날)이었습니다. 하루 전 날인 주일 저녁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제가 아는 어느 분께서 많이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침 다음날이 월요일이라 병문안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월요일이 되니 그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흐려졌습니다. ‘오늘은 쉬고 다른 날에 갈까?’라는 마음이 차츰차츰 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은 이런 마음을 먹고 있을 때 오늘의 복음을 읽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제 마음을 아셨을까요? 이후 제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네! 하느님께 제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마음을 고쳐먹고 사랑의 실천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보다 더 즐겁게 말입니다.
기다림 그리고 준비, 우리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대림시기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12월 11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 요한 1,6-8.19-28.
조재근(마르코) 월성성당 보좌신부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난 가을, 짙은 안개가 자욱한 이른 새벽에 메뚜기를 잡기 위해 황금들녘을 찾았습니다. 누렇게 익은 벼 이삭 사이로 질퍽한 땅을 조심히 밟아가며 메뚜기를 잡았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새벽에는 메뚜기와 숨바꼭질을 벌였고, 해가 뜨자 메뚜기들은 날다시피 뛰어다녀서 더 이상 손으로 잡기도 어려웠습니다. 메뚜기를 잡으며 메뚜기를 즐겨 먹었을 세례자 요한이 생각났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마태 3,4)
옷차림과 먹는 음식만 보더라도 요한은 참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요한의 대답을 보면, 사람들은 그가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일 거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진상 조사를 위해 유다인들이 멀리 예루살렘에서부터 전문가들을 요한에게 보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요한은 서슴지 않고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궁금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대체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그러면 그 예언자요?” 그때마다 요한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우리를 보고도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식당일 하시는 이모가 종종 오시는 손님 중에 참 괜찮은 분이 계셨다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분은 서빙하시는 이들에게도 참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함께 온 분들에게도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고 했습니다. 이모는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궁금할 정도로 멋진 분이셨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로만칼라를 하고 오시는 것을 보고서야 신부님이신 줄 알았다면서, ‘역시 신부님은 다르더라.’는 거였습니다. 신앙이 없는 이모에게 그 신부님은 삶으로 전교를 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선행을 베풀고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에게도 “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어오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우리 가운데에 서 계신다고? 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듣고 있던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궁금증을 자아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빛이 누구이신지 압니다. 빛을 따라 사는 빛의 자녀로서 성탄을 준비하며 동시에 하늘 나라에서 예수님을 마주 뵙는 날을 준비하는 이 세상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을 받을 수 있는 삶을 한 번 살아보고 싶습니다. 그런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게 되리라 믿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12월 18일 대림 제4주일 : 루카 1,26-38
김동진(제멜로) 성정하상성당 보좌신부
26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순명
대림 4주일인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의 수태고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업적과 계획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마리아의 순명의 자세를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며 신학교 시절에 있었던 일이 기억이 났습니다. 신학교는 학교생활 6년 반, 군대 2년, 사목실습 1년 총 10년 정도의 과정인데, 사제 서품을 3년 정도 앞두고 수단 착복과 함께 교회에서 공적인 독서를 할 수 있는 독서직을 수여받게 됩니다. 독서직을 받기 전에 수직피정과 여러 행사들을 하게 되는데, 그 중 가장 긴장이 되는 것이 신학교 원장신부님과의 면담입니다.
면담 받는 저희에게 원장님께서 미리 질문지를 내어주셨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순명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저는 그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을 준비해갔고, 면담 때 원장신부님께서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순명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자신 있게 말씀드렸습니다. “윗사람의 명에서 들려오는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원장신부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맞아! 그런데 또 다른 차원이 하나 더 있지. 윗사람의 명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아랫사람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순명의 본뜻이야.”
원장신부님의 순명이란 윗사람과 아랫사람 모두에게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저는 아직도 가슴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그런 순명의 자세를 가지고 온 생애를 사셨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순명의 차원을 넘어서서 성모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곰곰이 생각하여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신 성모님의 모범에 따라 이번 한 주간 참된 순명으로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됩시다.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 요한 1,1-18
이동철(대건 안드레아) 구암성당 보좌신부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모든 분들과 함께 성탄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부터 오늘 복음의 두 부분을 통해 예수님 성탄의 의미를 살펴보고 ‘예수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는 올바른 태도를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요한 1,1-5.9-14)
예수님 성탄의 의미
요한 1,1-3까지는 마치 창세기의 창조설화를 요약해 놓은 듯합니다. 요한복음의 시작 단어도 창세기와 같이 “한처음에”입니다. 이 단어는 세상 그 자체도 없을 당시를 나타냅니다. 즉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세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데(창세 1,1-2,3), 우리는 창세기에 나타난 표현 중 “말씀하시기를”, 또는 “말씀하셨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세상 모든 것이 창조된 것입니다.
요한 1,1-3은 바로 창세기에서 열거된, 하느님 말씀으로 이루어진 창조의 순간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1,4는 인간 창조의 순간(창세 2,7)을 다시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세 2,7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흙의 먼지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숨결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인간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의 숨결을 “빛”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발단을 토대로 요한 1,5를 전환점으로 삼아 그 시선을 구약에서 신약으로 돌립니다. 요한 1,5는 구약성경의 창조설화 다음에 나오는 죄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되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하고 죄에 빠져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종합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 생명의 근원인 “빛”과 그 빛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둠”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1,6부터는 본격적으로 신약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 1,6-8은 다음 단락에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고 요한 1,9로 넘어가겠습니다.
요한 1,9-14는 신약성경 전체를 요약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인간 생명의 근원인 “빛(창세기에서는 ‘하느님의 숨결’)”과 세상 창조의 근원인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시라 표현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 1,9에서 인간 생명의 근원이 된 “빛”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요한 1,10-11에서는 빛이신 예수님께서 ‘죄로 물든 세상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 탓으로 겪으신 수난과 죽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1,14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을 세상 창조의 근원인 하느님의 ‘말씀’이라 표현하고 그분의 부활과 승천을 자신과 다른 이들이 목격했다고 증언합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 성탄의 의미는 ‘죄’라는 어둠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그 원래의 지위인 ‘하느님의 자녀’로 돌려놓기 위함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예수님 성탄의 목적인 것입니다.
매년 이 시기에 세상은 ‘성탄절’이라는 축제를 만끽합니다. 거리의 온갖 아름다운 장식과 즐거운 캐럴이 그 분위기를 한층 돋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고 ‘산타 할아버지’만 기다리는 이들에게 성탄절은 그저 겨울에 한 번 지나가는 축제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아는 우리에게 성탄절은 그것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성탄절이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서 수난과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 성탄의 목적인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삶의 태도’에 대하여 고민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또한 그 고민을 통해 우리는 성탄의 목적에 응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의 태도에는 분명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존중하는 우리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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