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먼저 〈빛〉잡지 애독자분들에게 세배를 드린다.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빛’이 되길 염원하면서 모처럼 원고청탁을 받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고민해 봐도 딱히 하고 싶은 말은 생각나지 않은 채 탈고일자는 또박또박 다가왔다.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한 마디 해 달라는데 참으로 할 말이 없음은 어인 일일까. 세상일의 문제성을 못 느껴서도 아닌데 말이다.
다소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서양말로 한 해의 첫 달을 ‘January’라고 한다. 이 말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Janus’는 고대 이탈리아의 신(神)의 이름이다. 이 신(神)은 한 머리에 두 얼굴을 지닌 신으로, 세상만사의 시작과 끝을 맡아 다스리고 하늘의 문과 땅의 모든 문들을 지키며 전쟁과 평화를 가르는 신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뜻을 지닌 새해의 첫 달을 맞으면서 지난날의 일들을 되새기면서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내다봐야겠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의 두 얼굴을 보기로 하자.
지난 한 해에는 우리 대구대교구로서는 교구 100년을 맞는 참으로 큰 행사를 전(全) 교구민이 치르면서, 오늘이 있기까지 애써주신 분들과 하느님께 큰 감사를 드리는 축제를 지냈다. 일백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역사를 더듬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가다듬고 기념비적인 대성전을 짓자는 결심도 굳혔다. 또한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 것이 아닌(요한 15, 16 참조) 삶을 살고자 하느님의 뜻을 따라왔다. 문제는 시작 때보다는 엄청난 양(量)적 증대를 가져왔지만 작금(昨今)에 와서 질(質)적 향상을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갸우뚱할 수밖에 없고, 누적된 체험과 경륜으로 퇴보할 수 없는 듯했지만 실제 사정은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또 숱한 지난날들이 있었지만 새 날을 맞아 더 잘 살았다고 말 할 수 없는 날들도 많았다. 내 개인의 생활이 그렇듯 교회공동체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거의 반세기 전,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때 선언한 “교회는 늘 재형성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는 그 말씀을 이 시점에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교회 밖에 사는 사람들은 이 말의 뜻을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정권 때 힘주어 강조했던 핵심용어(Key Word) 역시 ‘혁신(Innovation)’이라는 단어였다. 중앙정부의 주요회합에 참석하더라도 빠지지 않은 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 출시된 차량에도 “Innovation”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을 정도였다. 무엇이 쇄신되었고 혁신되었는지는 아리송하지만 강조한 것만은 사실이다. 격심한 변화 속에 변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형편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까?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변화는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생명의 신비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갓난아이가 자라서 청소년이 되고 청년, 장년, 노년의 단계를 거치 듯 변해간다. 문제는 이렇게 성장과 변화하는 것만이 모두가 아니고 죽음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믿음의 공동체인 우리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 사실 생명 그 자체의 목적은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이 생의 목표가 되고 있는 삶이라면 우리는 생명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구약성경의 신명기 30장 15~20절 사이를 보면 우리 앞에 늘 두 가지 길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 하나는 생명과 행복에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과 불행의 길이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주님께서 내리신 계명과 규범을 지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그동안 잘 하지 못했다면 이제 다시 새롭게 갖추어야겠다. 그리고 쇄신되어야 할 부분은 못 해 온 것들을 더 성의 있게 실천하는 일이다. 그 일을 1년 중의 첫째 달 정월에 다시 시작해보자.
* 이용길 신부는 사제수품 후 계산주교좌성당을 시작으로 여러 본당에서 사목하였고 이탈리아에서 유학하였으며 대구가톨릭대학교 사무처장, 교구 사목국장, 가톨릭신문사 사장, 매일신문사 사장 등을 거쳐 1대리구 주교대리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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