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요~ 이 추븐날 날 해산하신다꼬 욕봤심더!”
몇 해 전 성탄전야의 일이다. 자정미사를 마치고 성당입구 십자가 아래에 마련된 구유 앞에 섰다. 방금 탄생하신 아기예수님, 성모님과 요셉성인, 동방박사들과 목동들, 먼 하늘에서 빛나는 별, 가슴이 벅찬 순간 칼칼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돌아보니, 조그맣게 오그라든 할머니가 목도리에 파묻힌 채 연신 절을 하고 있었다. 절하고 또 절하였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눈물겨웠다. 할머니 말씀처럼 이 추운 날 태어나셔서 말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이 눈물겹고,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곳에서 해산하신 성모님이 눈물겹고, 그 일들을 묵묵히 받아 안으신 요셉성인이 눈물겨웠다. 그리고 그토록 인정이 철철 넘치는 경배라니! 참으로 할머니답지 않은가.
경배합니다, 찬송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렇듯 판에 박힌 말들을 중얼거리던 내게 할머니의 마음은 아득하니 멀었다. 해서 나는 흉내라도 내고 싶었다. 그 후로 성탄절 구유 앞에 서면 나는 드러내놓고 할머니의 그 투박한 말을 표절했다. “성모님요~이 추븐날 해산하신다꼬 욕봤심더!” 그러면 놀랍게도 할머니의 마음과 성모님의 마음이 실감나게 와 닿고 내 마음도 그와 같아지는 걸 느끼게 된다. 그 마음인즉 어미의 마음이라.
대림 1주일 미사 중에 신부님이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지라는 요지의 강론을 하셨다. “대림절 중에 자매님들은 태중에 예수님을 배십시오. 태교를 하듯 좋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세요. 형제님들은 요셉성인처럼 아버지의 마음으로 태어나실 아기를 기다리십시오.” 하여 감히 예수님을 태중에 모시기로 작정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 되어 나는 태교를 아랑곳하지 않는 철없는 어미가 되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내게도 더러 뜨거운 마음이 있었다. 이를테면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가 예기치 않은 어느 순간에 불현듯 가슴에 와 깊이 박히는 것이다.(대개는 머리에 저장된 기도문들이 가슴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입술에서 줄줄 잘도 나온다.)
성모당에 갈 때마다 나는 세상 일이 너무 바빠서 거의 “성모님 안녕하세요?” 수준의 짧은 기도를 바치고 십자가의 길은 종종걸음으로 숨 가쁘게 지나가며 묵상(?)하곤 했다. 그런데 이따금은 14처, 그 한 곳 한 곳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핑 돌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특히 “제9처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의 ‘묵상합시다’ 라는 대목에서 말 그대로 묵상할 자세를 하다가 문득 내가 방금 또 예수님을 배반했구나,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듯 머리를 땅에 박고 엎어지셨구나, 하며 그렁거리는 눈으로 거꾸로 쏟아진 예수님의 머리카락과 휘어진 등을 짓누르는 십자가를 오래오래 바라보며 생각한다. 셀 수도 없이 많이 배반하였는데…. 그런 뼈저린 자각을 한다.
감히 예수님을 태중에 배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누추하다. 또한 그날, 베들레헴의 외양간에서 해산을 하고 뼛속까지 시렸을 성모님의 마음을 가늠한다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성모님의 지극한 마음 그 한 조각이라도 가슴에 담고 대림절을 보내고, “거룩한 밤, 고요한 밤” 에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예수님을 떨리는 마음으로 품에 안고 싶다.
아기 예수님, 소년 예수님,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의 청년 예수님을 키우신 어머니의 마음이 되어보고 싶다. 이제까지 나는 아기 예수님과 수난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만 마음에 담았었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셨을 예수님을 생각하니 그 어여쁨과 존귀함에 가슴이 아리고 또 벅차다.
얼마나 추우셨습니까,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정말이지 이제는 예수님을 안아드리고 싶다.
* 허창옥 님은 대구가톨릭대학 약학과를 졸업(구,효성여자대학)하였으며, 한국문협·가톨릭문인회·수필문우회·대구수필가협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수필집으로 <말로 다할 수 있다면>, <길>, <먼 곳 또는 섬>이 있고, 산문집으로는 <국화꽃 피다>가, 수필선집에 <세월>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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