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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아’는 없다


홍창익(비오)|신부 . 경주 근화여자중학교 종교교사

학교 현장에서

“여보세요?” 왜 이렇게 전화를 안받지.

 

“여보세요? 야! 영식아, 아직 자고 있냐? 지금이 몇시냐. 빨리 일어나 학교 와야지…” “알았어요, 선생님.”

 

오늘도 역시 지각하는 영식이. 이 아이는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아이다. 중학교 1학년인데 몸무게가 엄청 나가는 비만이며, 학교에 오면 수업시간에 잠을 즐겨 잔다. 또 몸이 무거우니 체육도 하기 싫어하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한다. 항상 빙그레 웃기만 하고 의욕도 별로 없다. 친구들도 함께 놀기를 꺼려하고, 운동도 같이 하는 것이 별로 없다. 단지 학교 오는 것은 선생님이 학교에 오라고 하니까 오고, 지각하면 야단맞고, 공부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그저 그냥 왔다 갔다 하는 정도이다. 당연히 학업성적도 떨어지고 교우관계도 원만하지 않다.

 

그런데 참 궁금하고 이상했다. 집에서는 어떻게 생활하기에 아침에 아이를 깨우지도 않는 것일까? 그리고 부모는 아이의 학교 생활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것일까?

 

실상을 알아보니 이 아이의 생활을 이해하고도 남을 만했다. 집에는 아이 혼자 독자로 자라고 있었고, 부모는 헤어져서 별거 중인 상태였다. 아빠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엄마는 밤에 유흥업소에 나가고 있다.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 그 길밖에 없다고 한다. 식당 일을 하자니 힘에 부치고 재미도 없으니, 예전에 하던 일을 계속 한다고 한다. 새벽에 귀가 하니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고 오후 늦게까지 잠을 자야 한다. 당연히 아이의 교육은 뒷전이다. 아이가 학교에 잘 가는지, 또 학교 생활은 잘 하고 있는지, 밤에는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돌볼 겨를조차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제 아이의 생활은 불을 보듯 뻔하다. 밤늦게까지 컴퓨터 게임을 하고, 라면 끓여먹고, 엄마가 저녁무렵 밥솥 가득 밥을  해 놓고 출근하면, 자기가 알아서 먹어야 한다. 물론 아침까지 아이 혼자 해결하면서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반찬도 변변찮은 데다 식사량은 조절이 안 되니 영양상태는 엉망이어서 살만 찌는 것이다. 또 아침에 깨워 줄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고 그냥저냥 살아간다.

 

보통 중학교 1,2학년 때는 최고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생활해야 할 사춘기 시절이다. 부모와 가정의 사랑을 받고 생활한다고 해도 반항하고 옆길로 빠지기 쉬운데 이 아이의 경우는 오죽하겠는가? 아이의 사정을 알고 있으면서 도저히 아이에게 야단을 칠 수가 없었다. 단지 부모가 원망스럽고, 야속하고, 안타깝고 불쌍할 뿐이다. 올바른 가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올바른 부모의 역할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에게 무엇을 바라고, 어떤 희망을 안겨 줄 수 있을까?

 

학교에서 생활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가정이 해체되어 편부모 혹은 할머니 하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참 많다. 그들을 볼 때마다 어른들의 잘못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잘못과 죄를 짓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상황들을 감안해 본다면 문제 아이란 없으며, 단지 문제 가정과 문제 부모에서 문제 아이가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가정과 부모의 역할

학교에서 모든 교육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가정은 교육의 가장 기초 단위의 학교이다. 가끔 어떤 학부형들은 학교에 와서 선생님들을 원망하고 따지면서 심하게는 욕설과 멱살까지 잡는 경우가 있다. 우리 아이가 왜 이렇게 됐냐고, 학교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했냐고…. 참 한심하고 답답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누워서 침을 뱉어도 한참을 뱉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먼저 나의 가정을 돌아보고 아이의 모습을 판단했으면 좋겠다.

 

학교 현장에서 선생님들은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생활지도를 한다. 때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반항하고 빗나가는 아이들의 태도에 실망하고 자괴감마저 들 때도 있다. 자기 속으로 낳은 자식도 잘 모르고 감당을 못하는데, 하물며 남의 아이를 어떻게 잘 알고 지도할 것인가. 하지만 나에게 맡겨진 아이의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현실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교사로서의 양심으로 내 아이처럼 마음 아파하며 돌보고 있다.

 

무엇보다 아이의 교육은 학교와 가정에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매 맞고 자란 아이가 나중에 자기 아이에게도 매를 들 확률이 높고, 가정불화 속에 자란 아이가 건전한 가정을 꾸미기는 어렵다고 한다. 아이들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그대로 아이들의 인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가장 밀접하게 접촉하면서 배우는 곳이 가정이고 부모들이다. 부모는 아이 인생의 최고 교사이고 가정은 최고의 학교이다.

 

예수님의 부모는 어떻게 예수를 교육했을까?

성서 안에는 예수님께서 정규 교육을 받은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추측하건대 어릴 때 요셉 성인과 성모님과 함께 살면서 배운 가정교육이 전부일 것이다. 교과서는 부모님의 삶과 율법서인 모세오경이다.

 

학교는 가정이고, 교과서는 성서이며, 교사는 부모이다. 가정에서 신앙교육과 삶의 교육이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지식이나 지혜가 부족한 건 아니었다. 하느님의 법대로,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대로 살면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모세의 법대로 정결례가 되어 예수님을 봉헌하는 날이 되자 성전에 주님을 봉헌하고 모든 예식을 마치고 나자렛으로 돌아 왔을 때,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루가 2,40)는 사실을 성서는 전하고 있다.

 

교육적 관심과 태도

성모님은 요즘의 일부 어머니들처럼 극성적인 교육을 하시지 않았다. 아들이 어려울 때도 끝까지 아들을 믿고 뒤에서 묵묵히 기도하면서 지켜주셨다. 아들을 잃어 버렸을 때도 사흘 밤낮을 애타게 찾아다니는 모습은 아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믿음 그리고 자신감이다. 하지만 그 사랑은 집착이나 자기 욕심이 아니라 아들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된 교육이다.  

 

예수님은 뛰어난 총명함과 지혜로 토론 수업도 잘하셨다. 성전에서 교사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총명함과 답변에 어안이 벙벙해졌다.(루가 2,46-47) 그리고 이 모든 사실 앞에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속에 새겨두었고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해 갔다.(루가 3,51-52)

 

하느님을 섬기며 법대로 살아가는 요셉성인과 마리아는 신앙교육이나 삶에서 아들 예수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그 가정에서 자란 예수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삶을 하나하나 배워 나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혼, 가출, 청소년 탈선이라는 말은 이미 사회문제에 큰 키워드로 자리 잡고 있다. 꼭 이혼 가정만을 가지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혼도 이미 가정이 붕괴되고 있는 첫 번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한해 두 쌍 중에 한 쌍이 이혼을 한다는 한국의 안타까운 현실 앞에 청소년들에게 전달되는 심리적, 정서적 불안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특히 청소년들의 교육은 학교와 가정이 함께 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 앞에 오늘날 가정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뿐만 아니라 청소년과 한국의 미래 문제로까지 걱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소외 받는, 이른바 ‘왕따’당하는 아이들이 참 많다고 했다. 그 아이들의 문제는 비단 아이 자신의 잘못과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가정과 부모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을 인식하고, 내 가정을 돌아보고 내 아이를 존중하고 관심을 가지는 가정교육이 최우선되어야 할 때이다. 그렇게 될 때만이 올바른 인성을 통한 지혜와 지식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