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 루카 2,16-21
김기환(미카엘) 두류성당 보좌신부
16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사랑의 어머니시여! 우리 주님의 어머니께 하례(賀禮)하나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하여 인류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당신의 모태(母胎)안에 저희와 생명의 근원이신 성자를 맞아들여, 성모께서 저희의 전구자(轉求者)이심을 언제나 깨닫게 하소서.
어머니시여! 당신과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목자들이 당신께 말씀드립니다. 저희는 이 고장의 들에 살며 밤에도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저희들의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저희는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저희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구원자의 어머니시여. 당신을 통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왔습니다.
어머니시여! 당신은 침묵하십니다. 당신은 성령으로 잉태하심을 전한 천사에게 어떻게 처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당돌하게 되물으셨고,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아름답게 노래하기 좋아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어나자 당신은 침묵하시며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십니다.
당신의 마음, 예언자가 칼에 꿰뚫리듯 아프리라 예언했던 당신 성심(聖心)속에 하느님 외아드님의 강생(降生)의 신비와 하느님의 영광과 평화가 온전히 담겨집니다. 하느님 신비를 담은 그릇은 그 세상 앞에 침묵(沈默)하며 영혼 속에서 그 신비를 반추(反芻)합니다.
사랑이신 어머니시여! 저희도 침묵하게 하소서. 침묵하는 저희 영혼 안에서 하느님 신비가 약동(躍動)하게 하소서. 저희 영혼이 당신의 모태(母胎)를 닮아, 구세주를 오롯이 닮게 하소서. 저희 영혼에 구세주께서 가득 차시면, 이 세상에 구세주의 모습을 삶 속에서 드러내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을 닮아 말이 아닌 침묵의 순종(順從)으로 이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 드러내게 하소서.
1월 8일 주님 공현 대축일 : 마태 2, 1-12
사공병도(베드로) 동촌성당 보좌신부
1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4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5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7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9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다시금 우리 앞에 놓인 주님을 향한 길, 오늘 우리는 네 번째 동방박사가 됩니다. 우리 여행의 시작은 기이하게 떠오른 별 때문입니다. 위대한 이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따라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동쪽에서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언제 끝날지… 또 얼마나 위험할지 모를 여행이지만 위대한 왕을 뵐 수만 있다면 그것들이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우리의 원의는 이토록 간절합니다.
지금 우리가 서있는 동쪽, 그리고 별이 떠 있는 서쪽, 사실 하느님 구원의지의 시작도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이어졌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살아가던 아브라함을 통해서 말이지요.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은 그 옛날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을 따라 걸었던 바로 그 길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길을 가다 잠시 지친 몸을 뉘였던 그곳이 야곱이 돌을 베고 누워 꿈에서 하느님을 만났던 그곳입니다. 또 우리의 걸음과 원의를 지치게 만드는 이 광야야말로 이스라엘이 40년간 하느님께만 의지한 채 걸어야 했던 바로 그 광야입니다. 그렇게 우리 하느님께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이 여정을 통해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오신 당신의 구원 경륜을 우리가 되짚어보게끔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여정에는 큰 걸림돌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여정이 별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별은 캄캄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태양이라는 큰 빛에 가려 조그마한 빛들이 보이지 않는 낮 동안에는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멈춰 서서 타는 듯한 햇살과 에는 듯한 모래바람을 견디어내야만 합니다. 눈에 더 잘 보이는 것이 아닌 감추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모진 고통들도 견디어 내야 하니 참으로 왕을 뵈러 가는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왕을 마주 뵐 수만 있다면 이깟 어려움들 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겠지요? 그렇게 처음에는 ‘이 정도 시련쯤이야’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열흘이 되고, 열흘이 한 달이 되고 나니 이젠 지칠 대로 지쳐버렸습니다. 해가 지고 나도 드디어 한걸음 더 내딛을 수 있겠다는 기쁨보다는 내일 또 다시 이 고통을 견디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몸서리가 쳐 집니다.
그래도 제법 걸어서 이제는 별이 우리 머리 위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아마 내일 새벽녁에는 왕을 뵐 수 있을 듯도 합니다. 때문에 목표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져버린 별이 야속하게 느껴집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없던 조바심이 솟아오릅니다. 위대한 왕을 어서 빨리 뵙고 싶다는, 이 고단함을 이제는 그만 끝냈으면 좋겠다는 그러한 간절함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별이 져버린 낮이지만 어림짐작으로 예루살렘 왕궁을 찾아 갑니다. 왕이라면 당연히 휘황찬란하고 안락한 왕궁에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방문과 위대한 왕의 탄생을 알리는 우리의 소식에 예루살렘 전체가 발칵 뒤집힙니다. 뭔가 우리가 크게 잘못을 한 기분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안내했던 별도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별만을 바라보며 계속 걸었어야 했건만 우리의 욕심과 안일함 때문에 우리는 위대한 왕을 찾는 소중한 단서인 별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탓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오히려 저 하늘의 별을 대신하여 우리를 이끌어 줄 또 다른 별을 보내주십니다. 바로 당신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말이지요. 그리고 성경 안에 떠오른 별은 우리를 작고 초라한 고을 베들레헴으로 안내합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 위대한 왕을 찾거든 꼭 알려달라는 헤로데의 음흉한 부탁을 받고서 사람들 몰래 왕궁을 빠져 나옵니다. 이제 성경에 뜬 별의 가르침대로 베들레헴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욕심과 안일함으로 잃었던 저 하늘의 별이 다시 나타나 위대한 왕을 향한 길을 비추어줍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를 앞서가던 별이 베들레헴 어느 여관 마구간 위에서 멈추어 섭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그곳에서 우리는 한 아기를 마주 뵙습니다. 저 하늘에 있어야 마땅할 큰 별이 이 땅에서도 가장 초라하고 낮은 이곳에 자리하고 계시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이내 우리의 상식을 넘어선 하느님의 섭리와 사랑에 대한 깊은 찬미로 바뀝니다.
천사의 당부로 먼 길 둘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파란만장했던 그 동안의 우리 여정을 되돌아봅니다. 우리는 그동안 위대한 왕을 뵙기 위해 큰 빛에 가려 감추어진 작은 빛을 쫓아야 했었고, 감추어진 작은 빛을 기다리며 닥쳐오는 모진 시련들을 인내해야만 했었습니다. 또 별 없이 나 홀로 위대한 왕께 나아가려다 길을 잃기도 했었죠. 하지만 위대한 왕을 가리키는 별은 하느님의 자비만큼이나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그분 말씀 안에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던 왕 중의 왕, 별 중의 별은 가장 초라한 곳에 가장 낮은 아기의 모습으로 계셨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 길 어디에서 보다 뜨겁게 가슴이 타오르셨나요? 그곳이 어디든 간에 우리는 그분을 만났고, 이제 중요한 것은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내 고향 동쪽에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일까요? 고향으로 방향 짓는 우리의 발걸음이 가볍기 그지없습니다.
1월 15일 연중 제2주일 : 요한 1,35-42
고태권(그레고리오) 동천성당 보좌신부
35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제가 2011년 6월에 사제 서품을 받았으니, 어느덧(?) 서품 여섯 달차 신부가 되어갑니다. 지난 여섯 달 동안 서품 때의 첫 마음을 잊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현실을 핑계 삼아 현실에 안주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요즘입니다. 그런 저에게 오늘 요한이 전하여 주는 복음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첫 제자 이야기!
복음은 스승을 따르는 제자의 마음가짐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들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며 두 제자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요한이 자신의 두 제자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 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이야기 하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생인 요한을 떠나 길을 나섭니다.
그들의 나섬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지요. 더하여 그들의 나섬은 목적지가 있다기보다는 예수님이라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분을 따라 나섬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이 가는 곳이 그들의 목적지이며, 그 분이 보여주시는 것이 그들이 배울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따라 나섬은 그들만의 따라 나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나섬은 새로운 이-시몬 베드로-를 데려옴으로써 스승의 새로운 제자로 불러 모읍니다.
지난 몇 달 동안의 저의 사제 생활을 되돌아봅니다. 물론 주님의 도우심으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죄송스럽게도 저 스스로 한계를 지워 놓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적이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확신하며 따라나서지 못했던 제 자신이 부끄럽고 후회가 들기도 하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목적지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나섬이지요. 그분을 따라나섬은 예수님이라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분을 계속해서 따라나서는 것이겠지요!
스승 예수님께서는 분명 저에게 “그레고리오야! 다시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렴. 내가 참된 어린양이며 메시아임을 보여줄 테니 너는 나를 따라주겠니?”라는 ‘와서 보라.’는 초대에 응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더하여, ‘저는 메시아를 만났습니다.’라며 확신에 찬 신앙생활 -사제생활- 을 하기를 분명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바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승 예수님을 따라나섬이 쉽지 않음을 이 초보 신부는 자주 느낍니다. 그래도 저는 또 다시 그분을 따라나서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와서 보아라.’하고 당신을 따라나선 이에게 당신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며, 스승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보여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또한 하늘나라에서 저를 눈여겨보며-뚫어지게- 말씀하여 주실 그때를 고대합니다. “너는 나의 아들 그레고리오구나, 앞으로 너는 나와 함께 할 것이다.”
스승 예수님의 동료 제자들인 여러분들도 초대 합니다! 우리 함께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을 따라나섭시다. 어디까지요? 예수님이 가시는 그곳까지요! 파이팅!
1월 22일 연중 제3주일 : 마르 1,14-20
허진혁(바오로) 삼덕젊은이성당 보좌신부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부르심에 대한 오해 1 : “부르심”은 성당에서만, 기도할 때에만 들을 수 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하느님의 결정적인 부르심을 받았던 때가 있습니다. 당시 저는 대학교 입시를 위해 재수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 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멀쩡하게 잘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수능을 100여 일 남겨둔 시점에서 ‘더 좋은 대학교와 학과’를 선택하기 위해 유명한 재수학원에 등록을 했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거룩한 성당에서 그리고 기도의 시간이 아니라, 그 반대로 더욱더 나를 세속적으로 만족시켜 줄 방법을 찾기 위해 선택한 그 장소와 그 시간에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복음에서도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자신들의 일상 중에,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성당에서만, 기도하는 시간 속에서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극한 일상 속에서도,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 있을 때에도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일상 속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집에서 밥하다가도, 직장에서 일하다가, 도서관에서 시험 준비하다가, 학원에서 영어공부하다가, 심지어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술 한 잔 기울이다가도 예수님은 우리 옆에 슬며시 다가오셔서 물으실 지도 모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부르심에 대한 오해 2 : “부르심”은 반드시 신학교나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나요?
세계적인 IT기업인 애플의 창업주였던 스티브 잡스는 기업 초창기에 전문 경영인을 영입하기 위해 펩시콜라를 코카콜라의 호적수로 키워낸 존 스컬리라는 당시 펩시 부사장을 만나러 갔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아직 전도유망한 기업에 불과했던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존 스컬리에게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고 합니다. “평생 설탕물만 팔면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저와 함께 세상을 바꾸시겠습니까?” 결국 며칠 후 스컬리는 애플로의 이직을 결정했습니다. 스컬리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일보다는, 분명 이보다 더 세상에 공헌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의 고기잡이에 만족하며 평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보다 더 넓은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습니다. 돈 벌어 먹고 사는 것이 전부인 그런 삶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에 초대하고 싶으셨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이에 응답하여 당대 세계 최고의 도시,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고기를 낚고 있습니다.”, “그럼 그것 그만 두고, 나랑 함께 사람을 낚으러 가자.” 고기와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부르심’이란 것도 꼭 성직자, 수도자의 성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와 가족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보다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고, 세상을 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1월 29일 연중 제4주일 : 마르 1,21-28
이수환(바오로미키) 원평성당 보좌신부
21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떻기에 율법학자와 다르게 새로움과 권위를 가지는 것일까요?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명령하니까 더러운 영들도 복종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또 그분의 가르침이 뭔가 모르게 힘이 있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면서 그분의 가르침이 새롭고 권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하! (전구그림 : 뭔가 알게 되었을 때 나오게 되는 감탄사와 그림)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떤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분을 만나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그분을 만나고 있 다면 우리는 회당에 있던 사람들처럼 그분의 가르침이 새롭고 권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떠하더라.’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질문은 ‘우리는 우리 삶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가?’입니다.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우르르쾅!( 번개그림 : 순간 머릿속을 때리는 번뜩이는 깨달음을 표현한 소리와 그림)
요한의 첫째 서간 4,16을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예,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을 만나고 있고 또 그렇게 만날 때 그분의 가르침도 새롭고 권위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자, 그럼 이제 책을 덮으시고요 사랑하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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