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사회교리’란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고 사회교리주간이 제정되었다. 앞으로 대림2주간이면 한국교회 전체가 사회교리에 대해 듣고 배우게 될 것이다. 사회교리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영역 곧 정치, 경제, 문화, 환경 등 우리 삶이 이루어지고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를 가르치는 교리이다. 이것은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가톨릭 교리의 사회적 해석 내지 적용이다. 해석이지만 역대 교황님들의 권위 있는 해석이라 무시하거나 내 마음대로 다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그런 가르침이다.
우리 사회에 있는 큰 오해 중의 하나는 교회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교분리를 이야기한다. 정교분리란 말은 역사적 배경을 지닌 말이다. 오랜 그리고 다양한 정교일치의 역사가 있었으며 근대국가의 성립 이후 정교분리의 원칙이 시행되어 오고 있다. 이것은 서로의 의존관계를 청산하고 독립한다는 의미이지 서로의 영역에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무슨 불가침조약 같은 것이 아니다. 정의와 평화, 인권과 생명존중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함에 있어 국가의 영역이 어디 있고 종교의 영역이 어디 있는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이 되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고 그런 노력이 현실정치와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들은 나를 성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내가 왜 가난한 이들이 굶주리는지 물으면 그들은 나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브라질의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의 말씀이다. 자선사업만 교회의 영역이고 조화로운 세상을 위한 제도적 개선의 노력에 교회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편견을 떨쳐야 한다고 사회교리는 가르친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루카 20.25)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정교분리의 금과옥조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의 방점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는데 있다. 세상에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정의와 질서는 황제의 영역 곧 현실세계 안에서도 실현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의 자각과 역할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제들이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하는 일은 아무리 그 명분이 분명하다 해도 조심스럽다. 견해를 달리하는 신자들도 많고 자칫 신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 신앙생활이 흔들릴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사명이 복음화에 있고 복음화가 단지 신자 수의 증가가 아니라 세상의 복음화를 지향한다면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 제일 좋은 방법은 평신도들이 나서는 것이다. 각성된 평신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정신으로 살고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도 제몫을 다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고민과 기대를 담은 움직임이 사회교리의 등장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소수의 사제들이 아니라 한국교회 주교님들의 일치된 뜻이 있으므로 그 무게감이 사뭇 다르다.
이미 이 사회교리에 입각해서 주교회의에서는 정부의 4대강 사업과 제주 해군기지건설에 반대의견을 밝힌 바 있다. 현 정부의 주요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야당을 지지하거나 야당을 편드는 것이니, 여당을 지지하는 나로서는 못마땅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여당이거나 야당이기 이전에 그리스도 당이다. 세상의 지혜를 버리고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를 받아들인 우리가 여전히 세상의 시각으로 교회의 가르침까지 가벼이 여긴다면 우린 도대체 어디에 속한 사람이란 말인가? 이 글이 실리는 란의 표제가 ‘열린 마음으로 세상보기’이다. 사회교리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열린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길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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