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대구 냄새….” 경기도에 있는 아들네 집에 가면 손자손녀들이 달려들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나의 체취가 단순히 할머니 냄새를 넘어 대구를 상징하는 냄새가 되었다는 뜻이다. 장롱 속에 오래 걸어두었던 옷이 분명히 향기로운 냄새는 아닐 터인데 저희 할미의 냄새라고 마냥 좋기만 한 모양이다. 그 냄새는 후각뿐만이 아니라 시각, 청각 등 오감으로 합성이 되어 할머니란 존재로 그들 기억의 창고에 보관될 것이다.
민족마다 몸에서 배어나오는 특이한 냄새가 있는가 하면 사람마다 풍기는 체취가 있다. 그것은 먹는 음식과 생활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땅덩이의 위치에 따라 흙이 다르고, 바람이 다르고, 태양의 색깔이 다르니 자라는 식물의 향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지역에 따라 즐겨 쓰는 향신료가 있고 가정마다 선호하는 식품이 따로 있으니 체취는 환경이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다.
비단 식생활뿐이랴. 각 가정의 내면에 흐르는 의식과 문화의 차이에 따라 그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도 다르다. 생각과 마음가짐에 따라 표정도 변하고 인상도 달라진다. 언제나 환한 얼굴로 온몸에 활기가 넘쳐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볼이 부어 화가 난 듯 암울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감정의 변화에서 오는 얼굴근육의 긴장과 이완에 따른 자연현상이라고 한다. 어쩌면 체취는 단순하게 냄새로만 분별되는 일이 아닌 한 개인의 삶의 이력이자 한 사람의 종합적인 인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경건하게 받는 또 한 가지 특별한 음식이 있다. 아무나 함부로 먹을 수 없는 신비의 음식, 성체(聖體)이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영성체를 한다. 예수님의 몸인 성체는 우리 영혼의 양식이다. 생명의 빵이다. 성체를 영함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된다. 우리 몸이 바로 감실이자 예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이다. 열심인 신자들은 일 년 삼백육십오일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참례를 하고 영성체를 한다.
체취란 몸 안의 것이 어쩔 수 없이 밖으로 풍겨 나오는 냄새다. 거짓 없는 내면의 반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의 향기를 몸 안에 지녔는가? 성체를 모실 때마다 혼을 다해 그분을 영접해 보았는가? 몇 십 년 영한 예수님의 몸과 피가 우리 안에 녹아 있는가? 가는 곳마다 그 향기를 밖으로 드러내는가?
가슴에 작은 공간 하나 남겨두자. 온갖 잡생각으로 가슴이 가득 차 빈자리가 없다면 그분이 어떻게 내안에 들어와 안착을 하시겠는가! 이제 이만한 세월의 내공이 쌓였으면 내게서도 향기 비슷한 것이라도 풍길 나이가 되었건만 아직 누구에게서도 향기롭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얼마나한 시간이 더 흘러야 그분의 향기가 나의 체취가 될까.
인간의 신체부위 중 가장 먼 거리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한다. 성체를 영할 때마다 못 말리게 쏟아지는 이기적인 기도, 나는 오늘도 영성체 후 내 가족의 안위부터 빌었다. 그럴 때마다 머리와 가슴이, 이성과 감정이 불협화음을 낸다. 그분이 살과 피를 내어주며 우리에게 시사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아마도 절제, 희생, 이해, 용서, 이런 단어가 아닐까 싶다.
공동선(公同善)을 지향하는 낮은 마음, 그것이 그리스도의 향기인 동시에 사람이 사람다워질 때 풍기는 냄새다. 사람냄새, 진솔한 삶의 향기, 가장 인간다운 그것이 가장 그리스도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 2004년 〈에세이문학〉 완료추천, 200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수필 ‘바람’ 당선.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에세이문학작가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대구여성문인회, 대구가톨릭문인회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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