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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독자마당


김형락, 김00, 민병옥

독자마당 ①
새해를 맞으며

김형락(스테파노)|가창성당

태전성당에서 영세를 한 지 벌써 16년, 이제 74세의 나이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드는가 싶습니다. 그리고 나의 몸가짐을 어떻게 하여 여생을 잘 마무리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 나이가 들면 너무 나서지 말고 미운 소리, 우는 소리, 헐뜯는 소리, 군소리 불평일랑 하지 맙시다. 그저 알고도 모르는 척 어수룩하게 그렇게 사는 것이 편하다오.

또 나이가 들면 누구에게 이기려 하지 말고 적당히 져주시구려. 그것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돈에 대한 욕심도 너무 부리지 말고 옛 친구 만나거든 술 한 잔 사주고 불쌍한 사람 보면 베풀어주며 산더미 같은 덕을 쌓으시구려. 불교의 가르침에도 보시(布施)가 있습니다. 우리가 꼭 물질적인 베풂만으로 덕을 쌓는 것이 아니라 눈빛, 환한 웃음, 부드러운 말씨 등등 이런 것들이 다 업(業)을 짓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돈이나 식량으로 베푸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정신적 가치는 아무리 베풀고 나누어도 모자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가창성당(주임 : 손종현 요한 신부)에는 창파어르신대학이 있습니다. 신자 분들은 물론 이웃의 비신자 분들도 오셔서 노래도 배우고 성경공부도 하고 또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건강 강의도 듣고 수지침도 맞고 합니다. 지금은 파크골프를 하는데 어르신들이 아주 좋아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세월이 참 많이 변했습니다. 스승이 학생을 체벌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지금은 학생이 스승을 체벌하는 시대인가요? 연일 쏟아지는 뉴스는 중학생이 여교사의 머리채를 잡고 발길질을 한다고 하고 또 담배를 압수하는 교감선생님을 중학생이 구타하여 충격에 입원했다는 소식 등. 그래도 그 제자를 어떻게든 선도하여 무사히 졸업을 시키겠다는 뉴스는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야말로 세월 참 많이 변했구려. 이렇듯 사회의 정화 역시 우리 종교인의 몫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나이가 들면 말도 조심해야겠지요. 아름다운 말 속에는 여운이 있고 맑은 샘물 같은 청량감이 있지요.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미사에 참례할 때, 기도문을 바칠 때, 또 찬미가를 부를 때 큰 소리를 내지는 않습니다. 절제된 목소리로 타인의 소리에 자신을 합류시켜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고 아무리 버티려고 애를 써 봐도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아 둘 수는 없구려. 그저 나의 자녀, 손자 그리고 이웃 누구에게든지 좋게 보이는 어르신으로 살아갑시다. 그리고 멍청하면 안 됩니다. 아파도 안 됩니다. 부디 우리 어르신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갑시다.

한 해의 삶을 돌아보고 새해를 맞으며 혹시 잘못이 있으면 뉘우치고 회개하여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다시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합시다.

 

 

 

독자마당 ②
최영배 신부님의《빈 그릇》을 읽고

김○○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자 최영배(비오) 신부님의 단상 《빈 그릇》의 책장을 넘겼다. 한 장 두 장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겼다. 가벼운 마음이 아닌 진지한 마음으로 접해야겠다는 생각에 책장을 넘기고 싶은 욕구를 애써 억누르고 보니 그 짧은 시간에 읽은 책의 글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진지한 마음으로 다시 책장을 열었고 신부님의 관점으로 책을 읽고자 노력하였다.

“이른 봄에는 바람이 불어도 꽃잎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글귀를 읽는 순간 내 마음엔 격랑이 일었다. 그리고 이 글귀가 내 마음속을 돌아다니며 나도 모른 사이에 형성되었던 마음 한쪽의 벽을 세차게 두드려 부숴 버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지금의 내 현실이 정상적인 삶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기에 늘 괴로운 마음을 감춰 둔 채 살고 있다. 가끔 왜 내게 이런 큰 시련이 다가와 이렇게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이고 있는지, 때로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향해 쓴소리도 내뱉곤 하였다.

그런데 그런 내가 울고 있었다. 내 안의 모든 찌꺼기를 쏟아낼 듯 통곡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감당하기 벅찬 현실과 마주해도, 거센 시련과 고난이 다가와도 그것을 시련이라고 여기고 고난이라고 여긴 것이 내 마음이었다니, 세상의 조건을 탓하고 주위환경을 원망하였던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니 슬펐다.

잠시 책장을 덮었다. 아픔, 눈물, 후회, 그리고 지금이라도 깨닫고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다시 책장을 열었고 한 글자, 한 글자를 마음에 깊이 새겨두었다. “작은 꽃잎의 그림자를 만들어주는 햇빛처럼 큰 사람은 하찮은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죄 앞에서 편안하며 타인의 실수 앞에서도 태연하기만 하나이다. 죄와 실수가 그 존재의 부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나이다.”(단상 18)

지금까지 나는 내가 행한 죄가 부분이 아닌 내 존재라고 생각하는 많은 시선을 받으며 살아왔다. 내 실수가 실수로 내 삶의 모든 것이 아닌 부분임을 인정받을 수 있으며 지은 죄를 내 삶의 거름으로 생각하리라 다짐해왔다.

이 책은 내게 있어 구원의 밧줄이자 삶의 인도자가 되어 내 가슴에 자리한다. 끝으로 묵주기도를 드린 후, 신부님의 글을 통해 마음속의  흙탕물 구덩이가 맑은 샘으로 바뀌도록 노력하리라 다짐해본다.
* 개인 사정 상 이름을 밝히지 않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독자마당 ③
순교(殉敎)

민병옥(비오)|중방성당

순례를 떠난 청양의 다락골 성지(聖地)는 최씨의 집성촌이었는데 이조 때 천주교 박해를 피해 최경환 성인의 부친께서 일가친척이 사는 이곳 ‘샛터’ 마을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최경환 성인이 태어났고, 그의 아들 최양업 신부님이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병인박해 때까지 신앙촌을 형성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병인박해 때 발각되어 수많은 사람이 배교하면 목숨을 살려준다고 했는데도 끝까지 하느님을 믿고 죽음을 택한 곳이라고 했다. 다락골 산등성이 넘어 그들의 묘들이 이름도 없이 줄지어 있다고 했다.

각지에서 순례객을 태운 버스가 좁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에 예수님 상이 있었는데 양팔이 잘린 채 고통을 호소하는 듯했다. 그 고통이 나에게로 내려앉은 듯 마음이 무거웠다. 경건한 마음으로 미사 예식이 시작되었다. 신부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다. 하느님 안에서의 겸손은 기도와 말씀에 대한 욕심을 많이 가지는 것이라 했다. 단 일분이라도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신앙의 성숙을 키우는 삶을 살라고 했다. 미사 예식이 끝난 후 줄무덤을 향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줄무덤이 있는 산을 올랐다. 각 처마다 큰 항아리(독)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고통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잠시 항아리(독)의 의미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 전국을 휩쓸었던 영화 ‘도가니’가 떠올랐다. 도가니는 천 수백도의 뜨거운 불길 속의 고통을 헤집고 태어났다. 온갖 열정과 분노, 고통과 시련, 희망과 소망을 담아내는 그릇이 아닌가. 여기 있는 항아리도 온갖 시름과 고통을 담는 도가니가 아닐까 싶었다.

예수님의 고통을 느끼면서 나의 소망을 항아리에 담았다. 십자가의 길 10처에서 세상을 욕심의 눈에서 마음의 눈, 즉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말씀에 귀가 번쩍 열렸다. 또 마지막 14처에서 “말을 잘 하기 위해 침묵을 주시고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지금 침묵으로 말하게 하소서.”를 가슴에 담았다. 드디어 작은 고갯마루를 넘었다.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을 지어 있었다. 한 무덤에 한 가족이, 또는 여러 사람이 함께 묻힌 무덤도 있다고 했다. 최양업 신부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린 자식을 위한 거짓말이 배교(背敎)로 받아들여져 아직 성녀의 반열에 들지 못했다고 했을 때 마음이 아파 눈물이 핑 돌았다. ‘배교’라는 말은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인 차이에서 해석이 달라지는 것 같다. 우리의 신앙은 서양에서 전파되었다기보다 신앙 선조들로 인해 자생적으로 태어났다. 유교의 바탕 아래 서학(천주학)의 연구와 강학이 모태가 된 것이다. 이벽 성조께서 아버지께 차마 불효를 저지를 수 없어 한 거짓말이 ‘배교’로 받아들여져 성인 반열에 오르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하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 아닌 것 같다. 하느님을 온전히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여겨진다.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도 미래 어느 날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지금 신앙의 삶이 미래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미래는 예측 불허요, 불확실하다고 했는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과거의 노력에 의한 삶이 지금의 삶으로 이어진 것이기 때문이라.

무거운 발길로 내려오면서 나의 신앙을 돌아보았다. 신부님 말씀처럼 교회 안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하느님 말씀을 좇은 것 같다. 교회 밖에서는 세상에 묻혀 세상의 눈으로 보고 행동하는 세상의 삶을 살아왔다. 과연 신앙의 선조들처럼 순교할 수 있을까 나에게 물어봤다. 성모님처럼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의지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받아들이며, 순교의 의지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본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에서 순교란 무엇일까? 시대와 처한 환경에 따라 순교의 의미와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지 싶다. 자기 편한 대로 낙태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하고 있다. 반면에 어떤 이는 자기는 죽음을 택하면서 어린 생명을 잉태하는 경우도 있다. 또 철길에 뛰어들어 행인을 구하고 자기는 죽음을 택하는 아름다운 모습도 접한다. 이런 행위와 모습이 오늘의 순교가 아닐까 싶다. 이런 순간의 선택은 어디에서 올까?

무거운 마음을 토해내듯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침 구름 속에서 빛이 나와 우리 일행에게 내려오는 듯싶었다. 그 빛을 온 가슴으로 받았다. 오늘 신앙 선조들의 뜻을 가슴의 항아리에 듬뿍 담고 세상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침묵’의 무거운 짐을 느끼면서 저 너머 붉게 물든 석양이 우리의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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