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5일연중 제5주일: 마르 1,29~39.
조재근(마르코) 월성성당 보좌신부
29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소금이 없는 세상, 빛이 없는 세상을 상상이나 해 볼 수 있을까요?” 1월 3일(화) 새벽 4시 30분,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어둠 속에서 월성성당 교리교사실에는 불이 환히 켜졌습니다. 시작기도와 강복으로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라는 주제 아래 1박 2일 간의 중고등부 겨울신앙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4시간 남짓 강원도 태백을 향해 달리는 기차 안에서 기타 반주에 맞춰 성가도 불러보고 조별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가운데 어느새 통리역에 도착했습니다. 기차 한 량을 전세냈기에 한 곳에 모여서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를 수 있었습니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본격적인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습니다. 첫 날 밤 고된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함께 모여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날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대목이었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8)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은 요한처럼 빛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마치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서 밤하늘의 어둠 가운데에서 빛을 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먼저 나 자신은 빛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빛이신 주님을 먼저 찾게 되지 않겠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에 꼭 필요한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참 소금과 참 빛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나에게서 예수님이 빠지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립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공동번역, 필리 1,21)
그날 오후 포스트 프로그램(태백산 곰돌이를 잡아라!)에서 제가 맡아 진행한 한 포스트에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으면 당신의 외아들 성자 예수님을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을까? 또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최후의 만찬 때에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셨을까? 그리고 속죄의 희생제물 파스카의 참된 어린양이 되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물로 주셨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커다란 사랑이었습니다.
그날 1독서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1요한 3,1)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요,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됩니다. 세상의 소금으로서 짠 맛을 내고, 세상의 빛으로서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13)
둘째 날 아침, 찬란한 빛을 받으며 눈 덮인 태백산에 올랐습니다. 햇살에 비친 눈은 반짝반짝 빛을 냈습니다. 주님의 빛을 받아 빛을 내는 ‘세상의 빛’이 됩시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2월 12일 연중 제6주일 : 마르 1,40~45.
김동진(제멜로) 성정하상성당 보좌신부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하고자 하시면…
몇 년 전 모 평신도 신학자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스타 강사 모 신부님 사이에 신학 논쟁이 있었습니다. 모 신부님은 수험생을 위한 기도문을 예로 들며 수험생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 나쁘지 않으며, 노력했으면 노력한 만큼 주님께서 이루어주시길 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셨습니다. 반면 모 평신도 신학자는 개인적인 청원을 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이 문제는 복잡하고도 대답하기가 상당히 조심스러운 테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인 청원을 할 수가 없는 것인가, 또 그리스도인의 엄청난 사명감을 잊고 개인적인 청원만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모든 신앙인의 고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한 나병환자와 예수님의 대화가 제시됩니다. 어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응답하시며 그를 고쳐주십니다. 이 복음에서 저는 나병환자의 태도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그의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 태도는 정의하자면 신비가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했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만일 그가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하느님께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없으실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신앙인의 태도라 할 수 없고 또한 하느님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내가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시다.’라고 생각하며 ‘하느님께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기도를 드린다면 이는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든 아버지의 뜻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개인적인 청원을 할 때에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해야 하고 그것이 신앙인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 라너는 그의 저서에서 ‘미래의 그리스도인은 신비가가 되어야할 것이다. 그가 신비가가 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개인적인 청원이든 보편적인 것에 대한 청원이든 신비가적인 관점으로 모든 것 안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시다는 것을 믿으며 개인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모두 다 청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2월 19일 연중 제7주일 : 마르 2,1-12.
이동철(대건안드레아) 구암성당 보좌신부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기적’이라는 사건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전하는 이 사건이 벌어진 시기는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카파르나움에 가셨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신 뒤 카파르나움으로 가셔서 사람을 치유하는 기적들을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다.(마르 1,21-32) 그리고 갈릴래아의 다른 지방으로 가셨다가 다시 카파르나움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두 번째로 오셨을 때는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람을 치유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계실 때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로 옵니다.
우리들은 여기에 모인 많은 사람들 중 두 부류의 사람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이란 바로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간 네 사람과 그 기적 사건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율법학자들입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간 네 사람
그들 네 사람은 중풍병자를 들것에 뉘어서 그 집으로 데리고 왔던 만큼,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굳건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갔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집을 모두 채워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보내기 위해 상식 밖의 행동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던 집의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러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중풍병자는 그렇게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평생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들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중풍병자를 더 이상 병자가 아닌 상태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그 실천이 영혼이 병든 이들을 구원에로 이끌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쳐준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율법학자들
반면에 예수님께서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일으키셨는데도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의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그들의 상식에 근거하여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단죄하려 했습니다. 그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이 사건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이라는 것에 근거하여 그 사건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율법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율법은 하느님보다 더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까지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세상의 상식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오늘 복음에서 보여준 두 모습, 신앙생활을 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의 모습에 비추어 성찰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2월 26일 사순 제1주일 : 마르 1,12~15.
김기환(미카엘) 두류성당 보좌신부
12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인도하시는 성령이시여!
거룩한 사순의 첫 주일에 당신의 은총에 힘입어 기도합니다. 당신의 이끄심으로 저는 그리스도와 함께 광야로 나아갑니다. 그 광야는 이 세상의 혹독함과 닮아, 황량하고 유혹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기댈 곳 없어 마음이 불안합니다.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예수님과 저를 이 광야로 내보내시나이까? 당신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때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성부께서도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이 혹독한 광야로 내모십니까? 당신의 신비로운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족한 저의 영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외롭고 초조합니다.
이윽고 홀로 선 이 광야에서 한 소리가 외칩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이사 40,3-5)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계시지 않으면 아무리 영화로운 도성이라도 황폐한 광야가 되고,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라도 당신께서 함께 계시면 에덴동산이 됩니다. 들짐승에서 천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이 당신을 섬기며 오로지 한 분이신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이 광야에서 드러납니다.
주님! 부족한 묵상으로 이 광야를 깨닫고, 여전히 부족한 입술과 마음으로 오직 당신만이 제 구원자이심을 고백합니다. 휘몰아치는 불안과 초조를 던져버리고 이제 저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붙잡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직 하느님만이 구원자이심을 알려주셨듯이, 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저의 영혼의 유일한 안식처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심을 다시금 알려주십니다. 이 광야에서 비워내고 또 비워내어 저의 구원은 오직 주님께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수감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나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광야에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자신의 장소로 갈릴래아를 선택하셨습니다. 도성 예루살렘이 아니라, 작은 고을 갈릴래아에서 당신의 업적을 시작하셨습니다. 겸손한 왕이신 주님께서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시고, 그 안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후에도 다시금 낮은 갈릴래아로 돌아오셨습니다. 나약하고 부족하여 불안에 떨던 가난한 제 영혼에 이제 주님의 말씀으로 충만합니다. 당신께서 저를 알아주시고 버리지 않으시니, 두려울 것이 없나이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인도하시는 성령이시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위로하시는 위로자시여!
사순을 살아가는 저희를 이끄시고 위로하소서. 보속의 사순 시기에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시며, 가난하고 작은 우리 영혼과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하소서. 겸손한 왕이신 주님을 본받아 하느님 앞에 저희의 부족함과 죄악을 솔직히 열어 보여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입게 하소서. 여전히 하느님과 세상에 한 발씩 나누어 딛고 절뚝거리고 있는 저희 영혼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 분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진정 깨닫고 믿게 하소서. 저희의 하루하루가 당신과 함께 한다면 그 길이 오직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오니, 그 길을 회개와 믿음으로 채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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