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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으로 세상보기
소통하는 교회를 희망하며


하성호(사도요한)|1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젊은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휴대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꾸는 것이 어떠냐며  젊은 신부가  내게 권한다. 얼마 전에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인터넷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그와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그가 그 프로그램에 대해 한참 설명을 하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그의 말을 가로막고 그 프로그램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마구잡이로 늘어놓았다. 그 신부가 말은 안했지만 추측컨대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젊은 세대의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사고의 유연성을 잃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이가 드니 느는 것은 말밖에 없다.”던 선배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나이가 들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제일 많이 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생각을 좀처럼 굽히지 못한다는 그런 뜻이리라. 나이가 드니 느는 것은 말밖에 없다시던 선배 신부님의 말씀에서 이젠 나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의 고집과 아집만 있고 상호 소통이 부족한 그런 사회나 단체는 상호 신뢰의 공동체를 가꿀 수가 없다. 그래서 최근 나의 대화 자세와 동료 신부님들과의 소통을 위한 노력에 대해 성찰을 해보았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사제는 사제이어야 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사제는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될 때 참된 사제가 될 수가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나 자신,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여야 할까? 예수님의 말씀이 뇌리를 스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나보다 더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은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함께 사는 형제 신부들의 얼굴이 커다랗게 떠오른다. 그렇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마음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고, 그들을 주님처럼 여기는 것이 또한 상호 소통의 기본임을 깨닫는다.

이러한 고민과 걱정은 우리 전 교회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신부님, 막상 나 자신이 삶에 너무 지쳐 마음이 괴로울 때 성당엘 가도 기댈 곳도 하소연할 데도 없습디다. 본당 신부님은 너무 바쁘시고, 1천 명이 넘는 신자들 가운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는데…. 왕따 당하는 학생 이야기가 학생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디다. 정말 외롭습디다. 나 같은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이겠습니까? 어려움을 겪고 답답해하는 사람의 말도 귀담아 들어주는 교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회는 상호 신뢰의 공동체를 위한 상호 소통을 온통 외쳐 댄다. 그것은 신앙 공동체인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 자신은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과연 얼마나 ‘마음이 가난한’ 신앙인인지를 성찰하여야 하고, 나의 말을 강요하기보다는 나보다 더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을 시급히 실천하여야 한다. 그런 신앙의 자세 없이 상호 소통이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상호 신뢰의 공동체 형성을 위한 바탕은 상호 소통이 기본이 아니던가?

눈높이를 맞추는 상호 소통을 게을리 한다면 우리 교회는 뭇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말 것이다. 때때로 열심하다는 신자가 더 폐쇄적이고 남의 마음에 더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을 볼 때 ‘저 착각을 누가 깨우쳐 줄 것인가!’라는 한탄을 하게 된다. 그런 사람에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떻게 해석될까? 열심하다는 것과 지혜롭다는 것이 정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고, 교회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친교의 공동체를 가꾸기 위해 상호 소통의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