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명동으로 향했다. 그 며칠 사이, 명동성당도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에는 고아원도 있었는데 아직 수녀님과 직원 몇 명이 남아있었다. 수녀원 역시 대부분의 수녀님들이 떠나시고 경상도나 충청도 등 먼 곳이 고향인 수녀님들만 몇 분 남아계셨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누님 수녀님도 아무 데도 못 가시고 아직 수녀원에 계셨으므로 앞으로는 같이 행동하기로 했다. 고맙게도 나에게 수녀원 직원들과 같이 기거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셔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내가 수녀원에 도착해서 겨우 사흘도 못되어서 수녀원마저 비우라는 명령이다. 인민군들은 고아들과 수녀들에게 수녀원 가까이 충무로의 학원 비슷한 건물로 가라고 했다. 수녀님들 역시 명동 모원을 뒤로 하고, 인민군이 정해준 집으로 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 수녀님들 중에는 편찮으신 분도 계셨고 연로 하셔서 거동이 부자유스러운 분도 계셨는데 어떻게 하랴? 들것에 실리고, 얼마 되지 않은 물건들은 들고, 이고, 지고, 메고-거리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은 거리였지만-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그 무렵 서울 시내에서는 인민군들이 젊은 남자만 보면 의용군에 입대하라며 강제로 잡아갔다. 의용군이 누구인가? 국군과 싸우는 인민군 측 사람이 아닌가! 아무도 의용군에 가려 하지 않고 집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밤마다 인민군은 서울 시내를 다니며 동별로 가택 수색을 하곤 했다. 마침 우리가 충무로 집에 갔을 때 그 날이 바로 그 동네의 가택 수색날이었다. 가지고 온 짐을 대충 정리하고 나니 늦어서 밥도 해먹을 수가 없어서 그저 물만 마시고 밥은 내일 아침에 해먹자고 늦게 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밖에서 소란스럽게 왔다갔다 하는 군인들의 소리와 고함소리, 담 위에서 뛰어내리는 소리 등이 들리더니 대문을 박차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문 열어!” 하는 고함 소리에 한참 있다가 “나갑니다!” 하는 수녀님의 가냘픈 소리가 들렸다. 한참 조용해서 ‘그냥 가버렸나?’하고 의심도 하면서 귀만 쫑긋 세우고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나하고 엿듣고 있었다. 나는 그 때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를 꼭 쥐고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성모여! 나를 도와주소서.’하고 기도했다. 멀리서 문 여닫는 소리, 발자국 소리 등이 점점 가까이 들리더니 내가 자고 있는 쪽의 방 복도에 도달했는지 갑자기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가 들리더니, “이 방에는 누가 있소?”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고아들 방입니다.” 확인을 하는지 미닫이 여는 소리와 ‘쿵’하고 닫는 소리도 들렸다. 또 “저 방은?” 하고 묻는 소리에 수녀님은 겁먹은 소리로 “저기는 편찮으신 수녀님이 주무시는 방이에요.” “맨 끝 방은?”(바로 내가 있던 방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거기는 피난 온 수녀 동생이 자고 있어요.” 나는 ‘이젠 죽었구나.’하고 십자가가 부러지도록 꼭 쥐고 ‘하느님, 하느님!’ 하며 숨도 쉬지 않고 다음 순간을 기다렸다. 또 뚜벅뚜벅 하는 발소리에 ‘아 이젠 다 틀렸구나.’ 하는 순간 잡혀가서 당할 무수한 고문을 어떻게 견디어 낼까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내가 자는 방 미닫이가 열렸다. 한순간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이젠 됐어요, 벌써 갔어요.” 하며 안심하라는 수녀님의 목소를 듣고 “네?”하고 벌떡 일어나서 한참을 어리둥절해 있다가 비로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하고 또 한번 도와주신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감사를 드렸다.
그 후 사람들은 ‘동생’이라는 낱말에는 남녀 구별이 없기 때문에 수녀원에서 자는 ‘수녀 동생’이라면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하고 수색하는 인민군관도 그냥 가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신부가 되기를 그렇게 원하시던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하느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피난길에서 일어난 일들을 반추해 볼 때 하느님의 손길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적 같은 사실들이 증명해준다. 그뿐 아니라 내 생애를 통해 하느님의 손길이 나를 감싸주신다는 것을 느끼고 늘 감사하며 산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내 생애를 이 ‘빛’잡지를 통해 말하고 있다.
또 한번 기적적으로 살아난 다음날, 남은 수녀님들과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의논했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겠는가. 서울을 떠나 어디론가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 전쟁 와중에 어디에 어떻게 간단 말인가. 이미 인민군이 점령한 대전까지는 통행은 가능하다고 하겠지만, 나이 스무 살에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신분이 아니지 않는가! 서울에는 온통 의용군 바람에 젊은이들이 자취를 감췄는데 시골 가는 길이라고 어떻게 안심할 수 있겠으며, 또 시골에 간들 안심하고 살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하리요. 그렇다고 서울에 남아 있을 수는 더더구나 없는 형편이었다. 어디로 가야 살아남을 것인가, 살아남아야 신부가 되지 않겠는가. 갈 수도 없고 안 갈 수 없는 진퇴양난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의견을 모은 결과, 일단 서울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다. 전선이 낙동강에 있었기 때문에 대구까지는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론은 충청도 예산으로 가기로 했다.
친구 서원식의 집이 예산에 있고 또한 윤을수 신부님의 조카인 윤 시메온 수녀님의 친정이 예산이었기 때문이다. 누님과 윤 수녀님은 친한 사이라 같이 가자는 것이다. 그간 서원식은 처음에는 나와 같이 숨어 살다가 내가 신학교로 다시 가면서 헤어진 후 아는 사람 집에 숨어 살면서 고향 수녀님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예산으로 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떠나기로 정한 날 아침에 우리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너무나 반가워 서로 부둥켜안고 풀쩍풀쩍 뛰면서 좋아했다. 우리 일행은 예산, 합덕, 삽교, 공세리, 공주 방향으로 가시는 수녀님 7분과 서원식 그리고 나, 도합 9명이었다.
1950년 7월 31일 오전 7시, 우리는 걸어서 피난길에 올랐다. 충무로를 거쳐 미도파 백화점에 다다랐을 때 저 앞에 인민군 검문소가 보였다. 나는 서울 지리를 잘 알기 때문에 수녀님들과 남대문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 검문소를 피해 다른 길로 갔다. 서울역을 바라보면서 걷다가 앞에 또 검문소가 있으면 앞에 가는 사람이 뒷사람에게 알리기로 했다. 수녀님들이 둘씩 둘씩 먼저 가고 맨 끝에 우리 둘이 가기로 했다.
한강에 다다랐을 때 인도교는 국군이 후퇴하면서 이미 폭파해버렸고 철교는 인민군이 사용하지 못하게 미군이 폭격해버렸기에 강을 건널 수 있는 수단은 배를 타는 수밖에 없었다. 인도교 밑에는 인민군이 군용 부교(軍用 浮橋) 설치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곳으로 갈 수는 없고 사람들은 인도교 동쪽, 백사장에 모여 한강을 건너려 하고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강 백사장은 서울의 명물 중의 하나였다. 여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백사장에 모여 뛰놀며 한강에서 수영과 보트놀이를 즐겼고 겨울에는 둥근 스케이트장을 여러 개 만들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즐기고 백사장에는 군대 군대 포장마차가 들어섰던 곳이다. 한강 넓이를 북쪽 둑에서 남쪽 둑까지로 한다면 지금 한강 넓이의 삼분의 일이 그 때의 백사장 넓이다. 그 넓은 백사장에 피난민들이 배를 타려고 수없이 흩어져 있는 것을 상상해보라. 수녀 한 분이 보트 주인과 교섭해서 우리 더러 빨리 배 타러 오라고 손짓을 했다.
우리가 그리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미군 비행기가 나타났다. 비행기 석 대가 원을 그리면서 인도교에서 부교 작업을 하는 인민군을 보고 기총소사를 하는 것 같았다. 석 대가 교대로 하나가 높이 솟았다가 내려오면서 기관총을 쏘아대었고, 다음 한 대가 총을 쏜 후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면 뒤이어 또 한 대가 내려오면서 총을 쏘아대니 밑에 있는 우리들은 우리 머리 위에서 비행기 석 대가 빙빙 돌며 총을 쏘아대는 것을 보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손에 있던 모든 것으로 머리를 감싸고 얼굴은 백사장에 파묻었다. 엎드리고 있다가 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만일 비행기에서 기총소사 하는 것을 이 때 보지 않으면 언제 또 이런 실전을 볼 수 있겠는가 싶어, 엎어져 누워 있다가 바로 돌아누웠다. 사람의 면적은 엎어지나 바로 누우나 크기가 매한가지 아니겠는가! 사실 나는 비행기들을 바라보면서 꼭 나보고 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마 백사장에 엎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을 거다. 그러기를 십 분쯤 총을 쏘아대더니 비행기들은 빙빙 돌다가 가버렸다.
수많은 배들이 수많은 사람을 서로 태우려고, 다섯 명밖에 타지 못하는 배에 얼마나 많이 태웠는지 강 한가운데쯤에서 가라앉는 배도 있었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다가 예약했던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넌 장소가 지금의 국립묘지가 있는 부근이었다. 가파른 언덕을 기어오르면서 5년 전, 임진강 나루터에서 38선을 넘으며 산을 넘던 생각이 났다.
서울을 떠난 피난민들이 길을 메우고 있었다. 길옆 어느 초가집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동무, 손 들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직감적으로 나보고 하는 소리인줄 알았지만 아는 체 하지 않고 그냥 앞으로 걸었다. 눈이 마주치면 모른 체 할 수도 없고 난처해질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랬더니 뛰어와서 인민군 장총을 내 옆구리에 쿡 찌르면서 다시 “손들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내 가슴은 콩닥질을 했지만 “급해도 침착해야 된다. 성모님을 찾으라.”는 어머님의 평소 말씀이 생각났다.
나는 뒤돌아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왜 이러시오?”하고 총 구멍을 슬그머니 비껴 치웠다. 인민군이 “지금 의용군에 가지 않고 젊은 사람이 어디를 가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아주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지금 학교에서 단체로 의용군에 입대하기 위해 집에 가서 인사하고 오라고 해서 가는 길이오!”하면서 신분증을 내보였다. 신분증은 한문으로 된 ‘성신대학교(聖神大學校, 서울가톨릭대학교 전신인 대신학교) 학생증’이었다. 사진에 붉은 도장을 크게 찍은 신분증을 보더니 한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런 증명서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빨리 서라는데 서지 않소!”라고 하기에, 이젠 됐다 싶어 “하여튼 집에 갔다가 와서 의용군에 갈 테니 빨리 보내주시오!”하고 걷기 시작했다. 다시 서라는 말이 없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기는 걷는데, 뒷꼭지가 간질간질 했다. 그리고 걸으면서 생각했다. 한문으로 ‘성신(聖神)’이라면 천주교라는 것을 누구나 알 텐데 아마 그 인민군은 한문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피난을 떠나면서 항상 메고 다니던 십자가 목걸이를 어루만지면서 “예수님 도아주소서.”하고 기도드렸다. 또 길을 걸으면서도 오른손은 항상 바지 호주머니 속에 넣고는 묵주를 쥐고 성모 어머님께 무사하기를 빌었다.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며 걷다 보니 발자국마다 흔들리는 십자가 모서리에 찍혀서 가슴에 상처가 났다. 그 때 그 목걸이가 바로 이 잡지의 사진 속 십자가이다. 보다시피 이 십자가는 목걸이용 십자가보다 훨씬 큰 것이다. 묵주는 내가 로마 유학 갔을 때까지 쓰다가 너무 낡아서 로마 우르바노 대신학교 성모당 옆에 파묻었다.
7월 말 뙤약볕 아래를 걸으며 물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한 채 긴장하며 걸은 탓인지 저녁때가 되니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석양에 물든 들녘에는 그 와중에서도 논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원을 앞에 두고 십 리쯤 되는 길옆 가까운 곳에 촌락이 있어 들어가서 수원에 가면 피난민이 쉴 곳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수원은 지금 피난민으로 가득 찼고, 차라리 이 동네에서 하룻밤 쉬어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친절하게 말해 주시는 선량하게 생긴 노인 집에서 하루 밤을 묵기로 했다.
저녁밥을 먹고 수녀님들을 위해서 방 하나를 부탁하고 우리는 밖에서 잘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방을 사양하고 마당에 나왔다. 마당을 향한 문간방 툇마루에 걸터앉아 지나간 한 달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다. 툇마루에 앉은 우리들이 이 동네 사람인지 피난민인지 알 리 없는 모기떼는 웽웽거리며 사정없이 달려든다. 마치 죄 많은 우리 인간을 응징이라도 하려는 듯이…. 우리는 6월 25일 이후 지금까지 한 달 하고 닷새 동안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일들을 노닥거리며 하늘을 보니, 음력 그믐이나 되었는지 구름 한점 없는 평화스런 밤하늘에서 고요히 흐르는 강물 같은 은빛 달빛이 전쟁에 찢기고 상처 난 한국의 산야를, 시달리는 우리를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 자다가 툇마루에서 떨어졌다.
누워서 눈을 떠보니 달은 벌서 중천에서 기울고 만상은 고요한데, 가끔 먼 곳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개 짖는 소리, 가냘픈 친구의 숨소리, 모기 소리, 벌레 소리들이 오히려 평화스럽게 들린다. 일어나 툇마루에 걸터앉아 친구를 들여다보다 친구 얼굴의 모기를 쫓는데, 친구도 돌아눕다가 나와 꼭 같이 툇마루에서 굴러 떨어졌다. 떨어진 자리에서 그냥 누워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도 달을 바라보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럴 때 나오는 웃음은 무슨 웃음이라고 하는지! 혼자 웃음 짓다가 “뭐 하노?”하고 말을 걸었더니 “깼어?”하며 일어나서 툇마루에 나와 같이 걸터앉아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얘기를 주고 받았다. 내용이라야 말하는 사람이나 듣고 있는 사람이나 현실성도, 실현성도 없는 꿈같은 얘기들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상황에서는 우리의 의지로 살아남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직 어두운데 김 메러 간다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수녀님들도 벌써 일어나서 길을 재촉한다. “고맙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하고 그 선량하게 생긴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아침밥도 거른 채,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새벽이라 시원하기도 하고 짧게나마 잠을 잘 자서 그런지 힘도 생기고 걸음이 훨씬 가벼워졌지만 ‘오늘도 별고 없어야지.’하는 마음은 한없이 무겁다. 집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비행기 소리가 나더니 폭격하는 소리가 들린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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