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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3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사공병도, 고태권, 허진혁, 김동진 신부

3월 4일 사순 제2주일 : 마르 9,2~10.
사공병도(베드로) 동촌성당 보좌신부

 

2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우리는 한 길로 접어듭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수난’과 ‘죽음’에 대한 첫 예고로 누리가 속절없이 어두워져만 갑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따르라.”는 비장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불어옵니다. 사실 그 예고 속에는 우리에게 빛이 되는 소리들도 빠지지 않고 섞여 있지만 어둠이 너무 짙어 담아내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시작부터 암담함 속으로 걸음을 밀어 넣어봅니다. ‘설마 이대로 버려두시지 않으시겠지?’라는 희망만을 간직한 채 말이지요. 아니나 다를까, 깜깜한 길 밖과는 달리 내가 가야 할 길 위에는 빛나는 발자국들이 놓여 있습니다. 과연 누가 있어 이렇듯 빛을 흘리며 지나갈 수가 있을까요? 잠시 스친 의문은 이내 ‘주님이 아니고서야!’라는 확신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빛 자국을 따라 걸어보기로 마음먹습니다.
첫 걸음을 내딛고 나니 빛 자국 주변으로 희미한 흔적들이 보입니다. 그제야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보다 먼저 이 빛 자국을 따라 걸어갔음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바로 그 주인공이지요. 가만히 멈춰서서 ‘왜 그들일까?’, ‘왜 그들만일까?’ 생각해 봅니다. 장차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혼쭐이 나서 풀이 죽어있는 베드로, 열두 사도들 중 처음으로 예수님 때문에 피를 흘릴 야고보, 성모님을 모신 채 다른 열한 사도들의 죽음과 교회의 핍박 받는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아야 했던 요한, 어쩌면 가장 깊은 어두움을 걷고 있거나 걸어야 할, 그래서 가장 빛의 위로와 희망이 필요한 이들이 바로 이 셋이 아니었을까요?
다시 걸음을 내딛고 나니 금새 주위가 환해집니다.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이 혼탁한 세상과 분리된 빛이 지척에서 번뜩입니다. 분명 저분이야말로 빛을 흘려 우리를 여기까지 불러주신 분이시고, 또 영원히 그 빛을 잃지 않으실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둠에 주눅든 채 새겨진 우리 눈 속에 있는 의혹의 얼룩들을 깨끗이 씻어냅니다. 빛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우리 눈은 상쾌함을 넘어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바로 그 순간, 그 빛 곁으로 율법의 아버지 모세와 예언의 어머니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마치 우리가 한껏 누리고 있는 이 빛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며, 예언의 완전한 성취임을 증언하듯 말이지요. 이 길은 감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빛 속에서 오고간 이야기 역시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극치이며, 예언의 마지막 성취인 십자가의 수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중 먼저 왔던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는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감내해야 했던 그간의 고생들에 대한 모든 보상을 이 순간에 받고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바람과는 달리 그 황홀했던 빛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절정의 빛을 뽐낸 뒤 점차 어둠 속으로 갈무리되어 갑니다. 이내 다시 어둠이 누리를 덮고, 길 위에는 늘 그랬듯이 빛 자국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습니다.
한참을 멍하니 빛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봅니다. 아직은 허락되지 않는 보상에 입맛을 다십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빛 자국에 걸음을 맞춰 내딛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는 말씀이 우리 발에 걸립니다. 얼마 전만 해도 예수님을 붙잡고 수난과 죽음을 강하게 외면했던 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예고를 어설프게나마 직시하려는 노력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빛 속에서 어렴풋하게나마 그게 전부가 아님을, 그 뒤에 무언가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는 그들 사이가 밝아집니다. 가슴 속에서 작다란 빛이 솟아나와 근심에 젖어있던 그네들의 얼굴이 활짝 펴집니다. 그리고 그 빛은 이제 뒤따라 걷던 우리 가슴에도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의 어둠은 빛을 삼킨 채 속절없이 더 짙어가지만 우리 마음 속 깊이 새겨진 그 빛은 좀처럼 흔들림이 없습니다.

 

 

 

3월 11일 사순 제3주일 : 요한 2,13~25
고태권(그레고리오) 동천성당 보좌신부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쇄신(刷新)’이라는 단어가 화두로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정치권도, 경제계도 모두들 ‘쇄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쇄신이란 ‘나쁜 폐단이나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 쇄신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는 걸 보니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것 같습니다. 따라서 쇄신이라는 말은 ‘정화(正化)’라는 말과 그 의미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사순 제3주일에 들려주는 복음은 성전정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을 보시고는,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우선시 되어야 할 성전에서 기도를 빙자하여 재물에 탐닉하는 사람들에게 채찍을 휘두르시어 쫓아버리셨습니다. ‘쫓아내셨다’, ‘쏟아 버리셨다’, ‘엎어 버리셨다’ 등의 단어에서 평소와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주님께서는 성전이 올바른 의미의 기도가 드려지는 곳,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가 바쳐지는 곳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오늘 저는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나쁜 폐단이나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열정이 필요함을 새삼 깨닫습니다. 쇄신이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살을 깎는 고통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내 안의 치부를 볼 때에만 가능한 것이겠지요. 쇄신이란 비단 한 사회의 지도자들만의 이야기는 분명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쇄신의 대상이며 정화의 대상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성찰과 쇄신을 위한 몸부림은 우리를 성덕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부활을 거룩히 맞이하기 위해 사순시기 동안 진행되는 판공성사는 우리들의 쇄신과 정화를 위한 교회의 큰 선물입니다. 판공성사 - 고해성사 - 때에 나의 잘못과 치부를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고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혹은 늘 습관적으로 짓는 죄들을 고백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하기 위한 결단과 행동, 열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전을 정화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결코 쉽지 않은 결단과 행동, 열정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참 소중합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성전, 성령의 궁전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번 사순 판공성사 때에는 이렇게 소중한 여러분들의 몸과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악습들을 쫓아내고 쌓아두었던 습관적인 죄들을 하느님께 쏟아 버리고 엎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의 몸을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거룩한 집으로 만들어서 거룩한 부활을 맞이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를 눈여겨보시며, 우리를 모두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쇄신과 정화가 꼭 필요합니다. 준비되셨나요? 그렇다면 이제 시작합시다!

 

 

 

3월 18일 사순 제4주일 : 요한 3,14~21
허진혁(바오로) 삼덕젊은이성당 보좌신부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집에 있는 어항이 너무 더러워서 하루는 어항을 깨끗하게 청소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금붕어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기 위해서 빨간 바가지로 물고기들을 건져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금붕어들은 필사적으로 바가지를 피해 다녔고, 결국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모두 무사히 옮겨져서 청소를 깨끗하게 끝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이 평범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시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금붕어의 시선입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커다랗고 빨간 바가지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나서 동료들이 순식간에 물 밖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금붕어 입장에서는 자신이 죽는 줄 알고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을 겁니다. 두 번째로 주인의 시선이 있습니다. 주인 입장에서는 금붕어가 살아갈 쾌적하고 건강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먼저 금붕어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지요.
아주 잠시의 시간만 참으면 되는데 그런 주인의 마음을 알 길이 없는 금붕어입니다. 불행하게도 금붕어의 눈에는 자신들을 구해줄 빨간 바가지가 그저 자신의 평화롭고 안전한 지대를 침범한 침입자요,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물고기가 아무리 똑똑하다 한들 물고기를 위하려는 주인의 깊은 속뜻까지는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주인은 금붕어가 자신의 넓은 마음을 이해해주길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주인이 바가지로 자신을 떠올릴 때 가만히 있기라도 하길 바랄 테지요. 이런 상황들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이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40여 년 동안 헤매야 했던 광야에서 높이 들어 올린 구리뱀을 바라봄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구약의 특별한 사건 속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질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높이 들어 올린 십자가는 죽음과 공포와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실패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삶이요 희망이요 구원의 표식이었습니다. ‘나는 너희를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우리가 언제쯤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심판은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등을 돌린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라는 말씀을 우리가 언제쯤 온전히 깨달을 수 있을까요? 혹시 그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항 속의 금붕어와 주인의 마음 사이의 격차보다 하느님과 우리 마음의 격차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죽음과 멸망이 아닌, 생명과 구원이다.” 이것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기에 설령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 앞에 서 있는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시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아픔들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끌어안을 때 우리는 구원의 길로,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3월 25일 사순 제5주일 : 요한 12,20~33
김동진(제멜로) 성정하상성당 보좌신부

 

20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27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29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3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31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3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3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희생의 가치>
최근 모 신부님의 행복에 대한 강의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저도 들어보았는데 참으로 유쾌하고 느낄 점이 많은 강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강의를 좋아하고 속시원해 하는 이유는 그 강의가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신부님께서 강의 중에 언급하신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위해 투자하라! 자신이 행복해야 자녀도 행복하고 가정도 행복하다.”라는 말씀에 많은 이들이 깊이 공감하며 실제로 삶의 방식을 바꾼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강의에서 많은 점을 수긍하고 긍정하면서도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며 씁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시대가 희생의 가치를 너무 가벼이 생각하고 경시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희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행복은 늘 십자가를 받아지고, 인내하며 견뎌낸 후에 얻어지는 참된 인고의 열매였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뒤를 따르려면,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태 16,24 참조), 자신의 피를 부어서 희생제물이 될 준비를 해야 하고(2티모 4,6 참조), 그렇게 하였을 때 마지막 날에 의로움의 화관(2티모 4,8)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희생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희생하고 참아 견디는 것은 한국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 가장 잘하는 전공분야이기도 하며 희생과 인내는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희생하고 참아 견디면서 힘들어하는 그 고난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단언하건대 그 희생과 인내는 구원으로 가는 방편이며 자신의 십자가입니다. 이 사순시기를 살며 참된 행복을 위해 희생과 인내를 받아 견디며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