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현장에서
“차렷! 경례.” “안녕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수업이 시작된다. 몇 분이 지났을까? “조용하세요.”라는 말이 교사의 입에서 잔잔히 흘러나온다. 하지만 교사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 재잘거리기 시작한다. 다시 몇 분이 지났을까? “조용하자.”라는 말이 교사의 입에서 빈번하게 외쳐진다. 잠시 멈칫,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또 북적이기 시작한다. 이제 교사는 서서히 화가 나기 시작한다. 마침내 칠판 지시봉으로 쾅쾅 탁자를 치면서 “야! 조용해.”라고 큰 소리로 야단을 친다.
학교에 처음 발령 받고 1년 차 수업할 때와 미사봉헌 할 때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꼭 양계장의 병아리 소리처럼 귀엽고 예쁘고 생동감이 넘쳐보였다. 그러나 2년이 되고, 3년이 지나면서 그 소리는 소음으로 들리기 시작하더니 가끔씩은 짜증이 나면서 듣기 싫어지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나는 수업을 참 잘하고 재미있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반에서 1년 동안의 수업을 하고 마지막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여러분 대답해 보세요, 신부님이 1년 동안 수업하면서 여러분에게 가장 강조하고 중요하게 말한 게 무엇일까요?” “서로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이웃을 도와주며 살아갑시다. 부모님께 효도합시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갑시다.”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적어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들의 대답은 정말 엉뚱하였고, 나로 하여금 힘 빠지게 만들었으니, 거의 절반 정도가 “조용해라.”하며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럴 수가! 순간 허탈감과 쓴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내가 얼마나 아이들과 교감이 없었으면 ‘조용해라.’는 말이 각인될 정도로 부르짖었을까? 참 부끄럽고 한심하다 싶어 많은 반성을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너무너무 떠드는 바람에 도무지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어서 “나는 이제 너희들하고 수업 못하겠다. 그러니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하고는 교실을 나와서 교무실로 와버렸다. 그러면 실장이 뒤따라 와서 ‘잘못했습니다. 수업해 주세요.’라고 말할 것이라 여기며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다시 그 반에 가보니 정말 자기들 마음대로 하고 있었다. 아니, 더욱 신나게 열심히 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 다음 깊게 생각해 보았다. ‘뭐가 잘못되었을까?’문제는 내가 아이들을 장악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내 손아귀에 집어넣고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에 모두가 따라 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아가 아이들의 정신세계까지도 그냥 집어넣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모두 일으켜 세워서 벌을 주기도 했다. 그들의 태도가 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온갖 잔소리에 아이들을 피곤하게 했고, 아이들을 수업 방해꾼 내지는 예의 없는 아이들로 만들어 버렸다.
이 얼마나 우스운 장면인가! 학생들을 아이들인 줄 알았다. 그리고 나는 어른이고 선생님이었다. 그러면 당연히 수직관계로 나의 것을 받아들이고,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내 안에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참 잘못된 생각이고,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아이들은 참 다양하고 개성이 강하다. 그리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과 스타일과 세계가 있는 것이다. 삼십대 후반의 선생이 십대 초반의 아이들에게 과거의 방식으로 다가가니 이런 결과는 당연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내려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지 그들의 생각을 알 수가 있고, 그들의 아픔과 기쁨, 세계를 알 수 있다. 앞에 선 사람들의 몫은 아이가 원하는 것과 그들이 자기의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그들 입장에서 그들 자신을 발견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해야 하고 인정해야 한다.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 절대 따라 오지 않는다. 그들도 그들의 소중한 모습이 있고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 어른들의 착각과 잘못된 생각은 오히려 그들의 삶에 방해가 되고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어떻게 다가 오셨나?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다. 굳이 그렇게 하시지 않아도 되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것도 아주 약하고 가난하고 작은 모습으로 내려 오셨다. 왕자도 아니고, 부자도 아닌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초라하게 내려 오셨다. 바로 인간과 똑같이 되심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만난 사람들 역시 화려하고, 권력이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죄인이라고 취급받던 세리 자캐오의 집에 직접 머무르시길 원하신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이 말씀을 듣고 얼른 내려 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루가 19,5-6)
예수님은 보고 싶은데, 자신은 죄인이라 그럴 수가 없었으므로 멀찍이 나무 위에 있던 자캐오에게 예수님은 먼저 말을 건네시면서 그의 집에 함께 하겠다고 하신다. 이 때 자캐오의 심정은 놀랍기도 했지만, 너무나 벅차올라서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속인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갑아 주겠다고 한다. 이것은 회개하여 새롭게 변화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모습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싫어하고 공동체에서 추방시킨 나병환자, 귀머거리, 소경, 마귀 들린 자, 세리, 간음한 여인 등 병자들과 죄인을 만나시어 그들의 병을 낫게 해주시고 용서 해주신다. 사람들이 자기들과 다르다고, 자기들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고 외면한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시며 모두 다 똑같은 한 인격체로 만나신 것이다. 아울러 아이들을 사랑하셨다. 어린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신다. 사람들은 어린이들을 인격적으로 부족한 올바른 사회 구성원으로 보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을 통해 구원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르 10,15-16) 사람들이 어린이의 순진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할 때 예수님께서는 아이들과 함께 하시고 손수 축복해 주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으로 내려오셨다. 내가 아프지 않고는 아픈 사람의 고통을 결코 이해할 수 없으며 함께 할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함께 하시고자 몸소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하셨다. 바로 강생의 신비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가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하려고 하는 실수를 범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이들은 더욱 더 멀어져 가서 통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모들은 내 아이가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일자리 구하여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지극히 당연한 마음이다. 그러나 그런 바람들이 지나쳐서 오히려 아이들의 개성과 인격과 달란트를 사라져 버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또 하느님께서 아이들에게 주신 각자의 능력과 고유한 모습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린다. 공부라는 획일화 된 틀 속에 아이들을 묶어 공부하는 기계로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은 생각도 많고 깊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빛깔로 살아가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에 함께 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공부만을 외치게 된다면 나중에 “공부해라.”라는 말만 머리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그러다가 부모가 원하고 내가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극단적인 행동으로까지 치닫게 하는 경우를 매스컴을 통해서 종종 접했을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지금 진정 원하고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주어야 한다. 그들이 고민하고,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세계를 그들 입장에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찾아 나서야 한다. 내 방식대로 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고, 나중에 잘 되는 길이라는 것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소한 그들의 눈높이에서 대화해보고, 그들 생각을 인정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면 공부도 더 잘 할 것이고, 그 중 공부가 부족한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적합한 다른 길을 찾아서 더 잘 살아 갈 것이다.
위에서부터 내 마음대로 끌어당기지 말자! 오히려 그들에게로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하자. 그러면 아이들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 것이고, 더욱 더 성숙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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