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마르 11,1~10
이수환(바오로미끼) 구미 원평성당 보좌신부
1 그들이 예루살렘 곧 올리브 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2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3 누가 너희에게 ‘왜 그러는 거요?’ 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셔서 그러는데 곧 이리로 돌려보내신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4 그들이 가서 보니, 과연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바깥 길 쪽으로 난 문 곁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것을 푸는데,
5 거기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이,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
6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말하였더니 그들이 막지 않았다.
7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8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9 그리고 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10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이 신부 : 아녜스 선생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사람들이 저렇게 환호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들이 다시 자신을 배척하리라는 것을 아셨을 텐데요.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사람들을 보는 예수님의 마음 그리고 그 시선이 100% 온전한 사랑이었을까요? 우리들의 삶을 보면 상대방이 다른 자리에서 나를 나쁘게 이야기한다는 걸 알았을 때, 그 사람을 보는 마음과 시선이 100% 온전하지 않잖아요. 약간 의심하게 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숨기잖아요. 과연 예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아녜스 선생님 :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아셨을 테지만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을 보는 마음과 시선은 100% 온전한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상당히 어려웠을 것 같아요. 하지만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것에 벌써 100% 온전한 사랑이 드러나잖아요. 예루살렘 입성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잖아요. 하느님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100%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겠다는 것이 드러나잖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예루살렘 입성을 하지 않으셨겠지요.
이 신부 : 그러네요.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당시 사람들을 100% 온전히 사랑하셨네요. 그분의 마음이 참으로 크네요.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온전히 사랑하시네요. 참으로 큰마음입니다. 문득 이런 시가 떠오릅니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큽니다. 큰마음입니다.
4월 8일 예수 부활 대축일 : 요한 20,1~9
조재근(마르코) 월성성당 보좌신부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목소리의 다급함과 떨림이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주간 첫날 이른 새벽, 마리아 막달레나는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캄캄한 어둠을 뚫고 사랑하는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지 뭡니까. 마리아는 두려운 나머지 캄캄한 무덤 안으로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누군가가 육중한 돌을 치우고 주님을 꺼내 갔다고 생각했겠지요. 주님의 시신마저 잃어버린 이 여인의 심정이 되어 봅시다. 엉엉 울면서 정신없이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말을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요?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의 머릿속에는 지난날의 잘못들이 재빠르게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슬라이드 쇼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닭 울음소리가 메아리로 들려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고, 잡힐까 두려워 십자가 곁에 있지도 못했던 베드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돌아가신 스승님의 시신마저 지키지 못한 베드로의 죄책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무덤이 비어 있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빈 무덤을 보고 당황해 했고 슬픔에 잠겼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무덤이 비었다는 것만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부활은 그런 차원을 넘어선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빈 무덤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예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 5ㄴ~6ㄱ)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어둠 가운데에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만 어두울 때가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아직 어두울 때였습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가장 처음으로 ‘빛’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쳐줍니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5) 빛이 생겨난 날이 첫날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간 첫날’이라고 밝힙니다. 이제 그 빛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습니다.
부활의 삶은 빛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죽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13)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부활은 살아생전 남을 위해 살 때, 거기에 행복과 기쁨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신앙인은 부활의 신앙을 사는 사람이고, 부활의 신앙을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으면서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산다면 우리도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빛의 자녀답게 뜨겁게 사랑합시다.
4월 15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 요한 20,19~31
김동진(제멜로) 성정하상성당 보좌신부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불신과 신뢰
요즘은 영화를 즐겨보지 않지만, 신학생 때는 수업이 없는 주말이 되면 선·후배 신학생들과 함께 영화관을 찾곤 했습니다. 그 당시 보았던 영화 중에 기억에 남는 영화가 하나 있는데, 바로 송강호 주연의 <괴물>이라는 영화입니다.
신학생들과 함께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한 후배 신학생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형, 다른 해외 몬스터 영화들은 몬스터에 이름이 정해져서 나오잖아요? 에일리언, 엘리게이터 등등…. 근데 이 영화에는 왜 몬스터의 이름이 없는 줄 아세요?” 제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그 후배 신학생이 어느 영화평론가의 리뷰를 미리 읽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영화에서 송강호가 자기 딸이 살아 있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잖아요? 몬스터의 이름이 정해지지 않고 그냥 괴물이라고 나오는 이유는 ‘불신’이 곧 한국사회의 진정한 괴물이라는 것을 감독이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대요!”
불신이 괴물이라는 그 후배의 말이 저에게는 크게 와 닿았습니다. 불신만큼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 있을까요? 또 부활 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 마음 안에 불신이라는 괴물은 얼마나 크게 자라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 해봅니다.
부활 제2주일인 오늘 복음은 의심 많은 사도 토마스의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제자들은 모두 부활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 사도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고 그가 돌아왔을 때 모두가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하자 그는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토마스 사도만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토마스 사도가 그렇게 심한 말까지 하며 불신을 드러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형제의 말과 증언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체험은 다른 것보다 형제의 말을 신뢰하는 것에서 옵니다. 진정으로 부활의 삶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제일 우선적으로 형제를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활을 체험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제일 우선적으로 형제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형제 안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형제를 신뢰하는 한 주간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4월 22일 부활 제3주일 : 루카 24,35~48
김기환(미카엘) 두류성당 보좌신부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생명(生命)이시며 부활(復活)이신 주님! 저희를 당신 말씀으로 불러주심에 감사합니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이 당신을 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당신 말씀 앞에 모인 지금, 저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어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迎接)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며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사건은 그야말로 경이(驚異) 그 자체였습니다. 그 놀라움이 무섭고 두려울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혜(知慧)나 상식(常識)을 넘어선 신비(神秘)였기 때문입니다. 이 신비 앞에 담담할 수 있는 이는 당신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계시(啓示)의 완성이신 그리스도 주님이시여! 당신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부활의 신비 안으로 저희를 이끄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고, 손과 발을 보고, 만지며 의혹은 기쁨으로 변합니다. 말씀을 듣고 주님과 만나는 때! 그렇습니다. 당신 앞에서 기도하는 그 때 저희 마음속 불신(不信)의 구름이 걷히고 신앙(信仰)의 무지개가 뜹니다.
이즈음, 제자들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기뻐할 때, 당신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십니다. 그들 앞에서 음식을 드셨습니다. 이를 통해 신비로운 몸으로 완전히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신비 그 자체인 분께서 스스로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시고 확증(確證)하시다니, 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입니까! 당신께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완전히 알려주신 뒤, 사명(使命)을 내려 주십니다. 그것은 복음선포(福音宣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증인(證人)으로 임명(任命)하십니다. 또한 지금 저희에게 주님의 말씀을 담아주시니 저희도 당신의 증인이 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슬픔과 절망에서 건지시어 신비로운 놀라움으로 이끄시고, 이 놀라움은 벅찬 환희(歡喜)로 저희에게 용기를 주며, 이 기쁨에서 깊은 믿음이 샘솟습니다. 당신의 손길을 따라가니 저희 영혼도 변합니다. 슬픔에 빠진 자에서 주님을 만난 목격자로, 신비한 광경의 목격자에서 그 신비를 믿는 신앙인으로, 주님을 믿는 신앙인에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증인으로 저희는 단련(鍛鍊)되고 성장(成長)합니다.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어두움 속의 찬란한 빛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당신을 만나 뵈오면 저희는 거룩해지오니, 부족한 저희를 당신의 증거자로 이끄소서. 또한 당신의 복음을 전하는 길 위에서 만날 두려움과 유혹에서 저희를 보호하시어 저희 마음에 언제나 믿음의 용기와 기쁨이 넘치게 하소서.
4월 29일 부활 제4주일 : 요한 10,11~18
이동철(대건안드레아) 구암성당 보좌신부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착한 목자와 삯꾼의 비교. 둘째,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셋째,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입니다.
‘착한 목자’와 ‘삯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라 밝히시면서 ‘착한 목자’와 ‘삯꾼’의 양들에 대한 태도를 비교하십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만큼 양들을 위하지만 삯꾼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양들을 버립니다. 그 행동의 차이는 양들과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착한 목자에게는 양들이 자신의 소유이지만 삯꾼에게는 단지 이익추구를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착한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지만 삯꾼은 양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로부터 온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삯꾼이라 할 수 있는 재물, 명예, 권력 등은 우리를 전혀 지켜줄 수 없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당신이 그 착한 목자임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양들’에 비유되고 있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당신과 우리의 관계를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신비로운 삼위일체적 사랑의 관계로 당신과 우리가 엮어져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으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하시기에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 심지어 미워하는 이들까지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이가 당신께로 오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랑은 요한 13,1에서 한 번 더 표현됩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당신께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다시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예고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예수’라는 사람의 목숨이 사라졌다가 다시 생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앞 두 단락에서 언급된 사랑으로 인해 모든 이를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희망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삶의 주인은 한 분뿐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도 한 분뿐이십니다. 그 분은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주신 분이시며, 지금도 사랑으로 그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는 분이시며, 훗날 그 생명이 영원한 행복에로 이어지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 지극한 사랑을 ‘착한 목자’이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땅에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것에 희망을 두지 않는 한, 아무도 우리의 생명을 영원한 죽음에로 돌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삶을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맡기시겠습니까, 아니면 겉으로 그럴 듯하게 우리를 지켜줄 것 같은 세상의 삯꾼들에게 맡기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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