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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성모 성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5월(성모 성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사공병도, 고태권, 이수환, 조재근 신부

5월 6일 부활 제5주일 : 요한 15,1~8 사공병도(베드로)|신부, 동촌성당 보좌
1“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우리는 다시금 여정을 시작하려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초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여정은 말씀을 통해, 말씀과 함께, 말씀 안에서 말씀의 주인과 그분의 뜻을 찾아나서는 길입니다.
우리는 출발하기에 앞서 주위를 둘러봅니다. 그러자 “이 땅의 이름은 ‘예수님의 유언’”이라는 푯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유언’이기에 헤어짐의 아쉬움과 남겨지는 이에 대한 안타까움이 곳곳에 서늘하게 묻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서 있기가 그리 괴롭거나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바야흐로 지금은 사순의 겨울을 이겨내고 맞이한 부활의 봄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에 왔을 때만 해도 분위기에 휩쓸려 여기에 뿌려져 있던 말씀의 씨앗들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봄이 되고 다시 찾은 이곳에는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어라.”, “내가 가서 너희 자리를 마련하면 너희를 데리러 오겠다.”, “보호자를 보내어 주겠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등 많은 위로와 격려의 새싹들이 대지를 뚫고 나와 우리를 반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들이 자신들을 뿌린 분의 애틋한 사랑을 머금은 채 어느 하나도 흩어짐 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뽐내고 있으니 우리가 아플 리도, 슬플 리도 만무합니다.
이제 우리 앞에 주어진 땅에 첫 발을 내디뎌봅니다. 그런데 이 땅은 생명력을 잔뜩 머금은 옥토(沃土)입니다. 이곳에 자라고 있는 갖가지 새싹들은 모두들 각자의 싱그러움을 뽐내며 가지런히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걸 보면 이곳에는 땅과 거기 심겨진 작물들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임자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생각이 이즈음에 미치자 그제야 비로소 “하느님의 밭”이라는 또 하나의 조그마한 팻말이 보입니다. 이곳 주인의 이름이 하느님이신가 봅니다. 우리는 이제 이 땅을 일구어낸 하느님이라는 농부에 대한 존경심에, 또한 이 땅의 넘쳐나는 생명력을 우리 안에 채우고자 신발을 벗고서 맨발로 걷기 시작합니다.
한참을 기분 좋게 걷고 있으니 이 땅의 중심, 가장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는 커다란 포도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띕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유독 이 나무 주위에만 둘레를 파고 거름을 가득 채워둔 모습(루카 13,8 참조)이 무척이나 인상적입니다. 이에 우리는 이 포도나무에 대한 농부의 각별한 관심을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포도나무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가만히 보니 농부가 잠시 떠나고 없는 이 자리 한 곳에는 불이 지펴져 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들을 태우고 있는 중입니다. 포도나무에서 잘려나가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 받지 못한 가지들은 마른 소리를 내며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태우고 있는 가지들이 농부가 끔찍이도 사랑하는 포도나무의 줄기만큼이나 웃자라 있습니다. 이런 가지라면 분명 줄기가 버티기에 벅찼을 것이며, 줄기로부터 받은 영양분을 모조리 자신을 위해 소비했을 테니 제대로 된 열매도 못 맺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포도나무는 덩굴식물이기에 그것이 아무리 오래되어 줄기가 굵어져도 울퉁불퉁해서 목재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열매의 효용이 ‘신이 내린 축복’이라 불릴 만큼 탁월하기에 목재로 쓰일 수 없다는 약점을 보완하고도 남습니다. 이런 포도나무가 열매를 못 맺는다니요. 그것도 가지의 욕심으로 그렇게 된데다, 그 욕심이 과해서 줄기까지도 위협하다니…. 농부가 어떠한 심정에서 그러한 가지들을 잘라냈을지 가슴 깊이 헤아려집니다.
정말이지 줄기 없는 가지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웃자란 가지는 농부의 정성어린 손길과 줄기의 아낌없는 사랑에 자기가 무엇이라도 되는 양 으스대며 지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러다가 말미에는 자신이 줄기가 되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줄기에게 받은 모든 것으로 자신을 불리는 데만 급급했을 테지요. 그러다 문득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따스한 햇볕, 우리의 무게를 떠받쳐주는 고마운 대지 그리고 우리가 외로울세라 찾아드는 온갖 조물들…. “이게 없다.”, “턱없이 부족하다.”며 비쭉하기만 하던 우리에게도 실상은 주어진 것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러고 나니 지금 우리의 맨발차림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받으려면 당연히 땅에 ‘착’하고 달라붙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받은 만큼 나누어야 함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그저 받아 채우려고 신발을 촐랑촐랑 벗어 던졌으니 말입니다.
다시 신발을 신고 이 땅을 벗어납니다. 이제 할 일이 생긴 것이지요. 이 말씀의 씨앗으로 우리가 맺을 영롱한 열매와 그로써 기뻐할 농부의 미소를 생각하니 오늘도 발걸음이 좀처럼 멈춰지지 않습니다.

 

 

 

5월 13일 부활 제6주일 : 요한 15,9~17 고태권(그레고리오)|신부, 동천성당 보좌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어느 주간지에서 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애독자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간지의 설문 결과 고3 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높은 성적’ 혹은 ‘학력’이나 ‘학벌’이라는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이 학생들이 행복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엄마, 아빠가 돈으로 싸우지 않는 가정의 화목과 가족이 아프지 않는 건강’이 전체의 56%를 차지하였습니다. 입시에 지친 학생들은 진정한 행복의 기준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한 15,1~8 참조)라는 말씀의 후반부 이야기입니다. 복음에서는 유독 ‘사랑’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요.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을 통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의 태초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인간에게 나눠 주시는 예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또한 그 사랑 안에서 높고 낮음-주인과 종의 관계-이 아니라 함께 함-친구-이라는 것이 있음을 배웁니다. 동시에 진정한 사랑은 도구를 사용하거나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요한 15,10 참조)에 머무를 때 거저 얻게 되는 열매(요한 15,8 참조)임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재미를 넘어 기쁨(요한 15,11 참조)을 배우게 된다고 말씀 하시지요. 그래서 사랑은 우리에게 계명으로 예수님의 명령으로 가슴에 심어집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입시 전쟁이라는 현실 속에서도 고3 학생들이 ‘가족의 화목과 건강’이라는 가치를 행복의 기준으로 꼽은 것을 보고 새삼 사랑은 삭막한 현실 속에서 더 그리워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동시에 현대의 도시라는 광야에서 복음적 가치로 살아가는 신자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얼마나 사랑이라는 것에 목말라 하실지 짐작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제가 살고 있는 동천동에서 사랑의 물을 퍼 나르기 위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려 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우리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과 함께 오순도순 이웃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주님 사랑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5월 20일 주님 승천 대축일 : 마르 16,15~20 이수환(바오로미끼)|신부, 구미 원평성당 보좌
15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그 여자들은 자기들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베드로와 그 동료들에게 간추려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도 친히 그들을 통하여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는 거룩한 불멸의 말씀이 두루 퍼져 나가게 하셨다. 아멘.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 선포가 이런 것이다.’라고 표현하기는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마음속에는 ‘이런 게 복음 선포가 아닐까?’ 하고 떠오르는 뭔가가 있긴 있지요? 그렇다면 다음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지난 사순시기에 동기 사제 모임이 있었습니다. 보통은 동기 신부님들끼리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거나 운동을 하며 모임을 갖곤 한답니다. 그런데 지난 사순시기에는 바로 아래 사진에 나오는 이곳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보시다시피 남탕입니다. 다함께 목욕을 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목욕봉사를 위해 모인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좀더 의미있게 보내고자 뜻을 모아 목욕봉사를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느 때와는 아주 다른 체험이었습니다. 신자 분들에게 늘 ‘봉사활동 하세요.’라고 말만 해 오던 입장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입장이 되고 보니 말만 할 때와는 전혀 다른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복음 선포를 하는 사람들이 복음 선포를 당했던(?) 날이었다고나 할까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남탕에서의 동기사제 모임…. 과연 이런 경우도 복음 선포라고 할 수 있을까요?

 

 

 

5월 27일 성령 강림 대축일 : 요한 20,19~23 조재근(마르코)|신부, 월성성당 보좌
19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간 첫날, 곧 주일입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제자들은 더욱 두려웠습니다. 밤이 되면 원래 그런 법이지요. 그런데 어젯밤보다 더 두려웠을 것 같습니다. 아침에 주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대체 어느 누가 주님의 시신을 가져 갔는지, 어찌된 영문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마리아 막달레나가 제자들에게 와서는 기뻐하며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실성한 사람 같았을 겁니다. 제자들은 그런 마리아를 보며 ‘얼마나 주님을 뵙고 싶었으면, 헛것이라도 본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그래서 그날 밤은 더욱 캄캄하고 두려운 밤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캄캄한 밤은 마치 제자들이 처한 상황과도 같았습니다.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그렇게 문을 잠가 놓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에 오셨습니다. 문이 잠긴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마리아 막달레나가 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리고 그 순간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상처 자국을 보여 주십니다. 못 자국이 선명한 손이요, 사랑을 베푸셨던 손이요,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던 그 손이었습니다. 창에 찔린 옆구리요, 피와 물을 쏟아내셨던 그 옆구리였습니다. 틀림없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제자들은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뵐 면목이 없었겠지요? 그런 제자들이 어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사랑의 은총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누구의 죄든지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십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힘으로 누구의 죄든지 용서할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받은 것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요한 8,34) 인간이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얼마나 바라셨으면 부활하셔서 처음으로 보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재차 주셨던 것일까요?
죄를 짓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죄인을 봅니다. 그는 마음의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속에 들어 가십니다. 환한 빛으로 어둠을 밝히시고 평화의 인사로 두려움을 잠재우십니다. 그리고 그의 죄를 묻지도 않으신 채, 자격도 없는 그에게 성령의 숨을 불어 넣어 주시면서 누구의 죄든지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십니다. 자유를 주십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한 마리 양이 죄를 용서받고 자유를 찾게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고해소로 들어갑니다. “…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