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시중에 유행했던 우스개 가운데 하나인 ‘다섯 가지 불가능한 일’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첫째, 하늘의 별따기. 둘째, 스님 머리에 핀 꼽기. 셋째, 디자이너 앙드레 김에게 검은 옷 입히기. 넷째, 은퇴한 남편 존경하기. 다섯째, 며느리 남편 내 아들 만들기가 그것이다. 앞의 세 가지 당연한 이야기는 뒤의 두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누구나 다 아는 얘기겠지만 그저 우스갯소리로 넘기기에는 서글픈 현실을 곱씹게 하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마저 든다. 가족을 위한 희생도, 손발이 다 닳도록 자녀들에게 베푼 사랑도 쉽게 잊혀져가고 가족 사이에 높아져만 가는 단절의 벽을 체념하듯 받아들여야 하는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이젠 일상처럼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불가능한 일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비유도 씁쓸하지만 우리 신앙공동체 안에서도 ‘불가능한 일’이 적지 않다고 걱정하는 이야기를 자주 듣곤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우리 공동체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끼리끼리의 벽 깨뜨리기’이다. 이러한 끼리끼리의 벽을 깨뜨리기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노력조차 않고 체념하고 포기해버려도 괜찮은 것일까?
중동지역의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친족끼리의 결혼을 고집하는 곳이 많다. 이런 근친결혼은 알다시피 많은 문제점들을 야기한다. 특히 태어나는 자녀들에게 적잖은 화를 미치는데, 많은 기형아들의 출산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끼리끼리’의 결합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학적인 관점에서도 똑같이 화를 미친다. 인간사회가 ‘끼리끼리’ 어울리고 ‘끼리끼리’만의 폐쇄된 삶을 고집한다면 건강하지 못한 기형사회로 변질되고 만다. 편협한 주의주장에 빠지거나 외곬으로 치닫게 되는 독선적 사회에서는 폭넓은 발전과 건강한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더구나 ‘끼리끼리’에 배제되어 있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그 상처는 상상을 초월하는 큰 아픔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다. 요즘 들어 심각하게 부각되고 있는 청소년들의 왕따와 학교폭력 역시 건강하지 못한 우리 기성사회가 낳은 병폐가 아니겠는가!
우리 신앙공동체 안에서도 ‘끼리끼리’의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 당연한 듯 뿌리내리고 있다. 마음이 맞는 회원이나 단원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바오로 사도의 경고처럼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1코린 1,12) 하는 식의 파벌의식과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는 배타성이 문제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본당에서 유능하고 인품을 갖춘, 그리고 신심 깊은 신자가 있다 하여도 그 지방 출신이 아니면 간부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쉬는 교우들이 냉담하게 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이런 ‘끼리끼리’의 배타성으로 인한 상처 때문이라고 한다. ‘끼리끼리의 벽’은 신앙공동체 안에 도도하게 흘러야 할 사랑의 강물을 알게 모르게 오염시키는 독약이 되고 있다. 이 벽을 깨뜨리는 것이 그렇게도 불가능한 일일까?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귀가 따갑도록 듣는 주님의 말씀이지만, 못에 박히시고 칼에 찔리시며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을 묵상하는 예수 성심 성월에 ‘끼리끼리의 벽’을 한 조각씩이라도 깨뜨려보면 좋겠다. ‘끼리끼리’만으로 폐쇄되어 다른 이를 배척하기 보다는 모든 이를 기꺼이 포용하는 개방된 신앙공동체가 우리 공동체여야 하지 않겠는가!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1코린 12,13) 구분 짓지 말고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마태 25,40)도 외로운 외톨박이로 남아 있지 않는 편안하고 건강한 신앙공동체를 만드는데 우리 모두가 한 방울의 피라도 흘려보는 성심 성월(聖心聖月)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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