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부활 제2주일을 지낸 다음날 월요일이면 대구대교구 본당 사무직원들은 1박 2일의 성지순례를 떠나는데, 올해는 4월 16일(월)~17일(화) 전주교구 내 성지를 순례하는 것으로 짜여졌다. 4월 16일 아침, 본당 사무직원회 담당 박석재(가롤로, 교구 사무처장) 신부님의 인솔로 87명의 사무직원들은 버스 두 대를 꼭꼭 채워 전주로 향했다. 엠마우스가 늘 그러하듯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지 막연하기만 한데, 버스는 어느덧 전주시내 초입에 자리잡은 한국의 몽마르뜨라 불리는 치명자산성지에 도착했다.
이곳은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유중철 요한·이순이 누갈다 동정부부를 포함해 일곱 분의 순교자가 모셔진 곳이다. 이순이 누갈다는 첫영성체 때 성체를 모시며 자신의 영혼, 육신 일체를 예수님께 드리고 동정녀로 살기로 결심했다. 당시에는 과년한 양반집 규수가 혼인하지 않는 것이 법에 어긋나므로 부득이 유중철 요한과 혼인은 하되 오누이처럼 살며 동정을 지키기로 약속하였고, 그렇게 둘은 4년 남짓 동정부부로 살다가 순교하였다. 예수님 사랑만이 전부이셨던 분! 그래서 홀연히 하느님 품으로 사라지셨던 것일까? 산 위에 있는 기념성당의 벽면에는 이 누갈다가 치명을 준비하며 친정어머니께 보낸 편지글이 모자이크 되어 있었다. 편지를 읽다가 절절이 묻어나는 애틋함에 그만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순교자들의 순결한 신심과 고매한 덕행, 순교정신을 기리며 일행은 다음 목적지인 전동성당으로 향하였다.
전동성당은 1908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23년에 걸친 오랜 공사기간을 거쳐 1931년에 축성되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답고 웅장한 이 성당은 전주성 남문 밖 순교 터에 순교자들의 피를 적신 흙으로 구운 벽돌로 지어졌다고 한다.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한 윤지충 바오로는 “제사의 음식은 육신의 양식으로 영혼에 음식을 드리는 것은 허례허식이다. 신주는 목수가 만든 목편에 불과하니 영혼이 물질적인 나무에 붙어 있을 수 없다.”고 전라 감사에게 말함으로써 조선 조정이 발칵 뒤집어졌다. 깨달았다고 다 실천할 수 있을까? 조선의 골격과도 같았던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변화의 바람은 박해의 피바람이 되어 이 자리에서부터 일기 시작하였다. 윤지충과 그의 사촌 권상연, 그리고 가성직단 사제로 임명되었다가 그 부당함을 알고 *대박청래(大舶請來) 운동을 펼치다 사학괴수로 능지처참을 당한 유항검 등 이 지역의 초대 지도자 여덟 분이 전동성당 터에서 순교하신 것이다.
성당 밖 넓은 마당에 서니 금싸라기를 뿌려놓은 듯 봄 햇살이 반짝이는데 맞은편에는 연초록 새 잎을 달기 시작하는 고목들 사이로 시꺼먼 골기와를 인 경기전과 연이어 한옥들이 널찍이 자리 잡았고, 왼쪽 저만치에는 전주성의 남문인 풍남문이 보인다. 별로 넓지 않은 길에는 관광객들이 쉴 새 없이 오가고, 근대식 벽돌건물인 성당과 한옥들은 서로 잘 어우러져 있다. 이쪽을 보면 조선, 뒤돌아서면 서양. 마치 성리학과 천주교가 건축물에 담긴 듯 극명히 대비되는 묘한 곳이다. 기존의 질서와 새로운 가치, 갈등과 융합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러한 평온함의 바탕에는 순교자가 있다. ‘순교’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죄수를 형문하는 영화 장면이다. 순교자들을 묶어놓고 매질하고 불로 지지고… 생각만 해도 무섭다. 그런데 순교자들은 그 처참한 고통을 어떻게 참았을까?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어 다음 행선지인 나바위성지로 향했다.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0월 12일 밤 이곳 나바위성지에 첫 발을 내딛으셨다. 페레올 주교님, 다블뤼 신부님과 11명의 교우들이 함께 오신 것이다. 소년 때 조선을 떠나 수만 리 멀고도 먼 중국 마카오에서 긴긴 날 오직 그분의 뜻대로…. 아! 이런 엄청난 일들이 계획되고 진행되고 있음을 당시 어느 누가 상상인들 할 수 있었을까?
나바위성지 피정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 페르모렐 신부님이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님을 위해 지었다는 정자(망금정)에 올랐다. 사방 몇 십 리라도 보일 듯 탁 트인 평야지대 사이로 금강이 느릿느릿 흐른다. 물살이 풍부하고 물길이 좋아 조선말 삼남지방에서 제일 큰 장이 섰다는 강경이 지척인데 군산항에서 강 따라 물길 백 리, 오고가는 장삿배들 사이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일행을 태운 라파엘호도 중국 상해를 떠난 지 42일 만에 저 강을 따라 왔으리라 짐짓 생각해본다.
나바위성지는 김대건 신부님의 발자취와 더불어 지난해 100주년을 맞이한 우리 대구대교구와도 인연이 깊다. 드망즈 주교님의 부임으로 대구교구가 설립되었는데, 그분께서 경치가 좋고 조용한 이곳에서 해마다 피정을 하셨기 때문이다. 드망즈 주교님은 전쟁에 패해 독일에 빼앗긴 땅 프랑스의 알사스 지방 출신이다. 알사스 지방은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의 무대가 된 곳으로, 주교님도 대략 그 무렵에 태어나셨으니 일본에 강점당한 우리나라와 비슷한 피점령국의 슬픔과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약육강식의 살벌한 격동의 시기에 이제 막 시작하는 우리 대구교구의 목자로서 사목의 책임과 지키고 보호해야 할 것 또한 많은 가운데 우리 교구의 초석을 든든히 하셨다. 그래서 그분께서 쉬시며 기도하시던 이곳이 결코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드망즈 주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비록 순교자의 피와 땀을 따라갈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 아이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야겠다고 다짐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하느님! 드망즈 주교의 하느님! 그리고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온전한 인간 예수가 되시어 제자들조차 믿기 어려웠던 부활사건을 보여 주셨으니, 우리는 당신 안에서 부활이라는 영원한 삶을 함께 하리라 믿습니다.’
정자에서 내려와 나바위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중 박석재 신부님의 강론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본당의 사무직원들은 세상의 잣대로 재단한 것이 전부가 아닌 교회의 봉사자들이다. 물론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기도 하겠지만 인간 본 모습을 생각해 보면 100년 뒤 이 자리에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의미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하고 많은 일 중에서도 교회를 직장으로 삼았으니 이 또한 연봉으로만 계산할 수 없는 복된 직업이 아닌가. 거부하든 받아들이든 싫든 좋든 이미 그분께서 마련해 놓으시고 나를 쓰시고자 함은 그분의 섭리가 아닌가?”
‘예, 그러하옵니다. 주님, 이 어리석은 종은 잊고 살았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내내 성당 사무실에서 일하는 내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세상이 교회로 들어오는 창구에 내가 앉아 있다.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교회를 묻는다. 그런데 나는 무감각하게 일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의 이 나약함과 부족함을 어찌해야 하나! 하느님의 진리 앞에 재물과 지위와 명예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순교자님, 도와주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 부족하기만한 저희와 함께하여 주십시오. 이 봄, 대지에 가득 찬 햇살마냥 저의 가슴에 쫙 스며드는 당신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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