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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예수 성심 성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6월(예수 성심 성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황은모, 김동진, 이동철, 김기환 신부

6월 3일 삼위일체 대축일 : 마태 28,16~20
황은모(요한)|신부, 반야월성당 보좌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면서 세 분이시고 세 분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이시라는 삼위일체 신앙은 그분의 계시 진리의 정점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가장 알아듣기 힘든 것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문득 이런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왜 하필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셔야 했는가? 그냥 유일하신 하느님이라고 하면 알아듣기도 쉬울 텐데 왜 한분이면서 동시에 세분이라고 해서 우리를 이처럼 아리송하게 만드시는지 의문이었습니다.


삼위일체는 참 알아듣기 힘들고 머리로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신비입니다. 하지만 어렴풋이나마 삼위일체 신비의 해답을 알게 해준 것은 바로 그분이 ‘사랑 그 자체’라는 점에 있었습니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 둘이서만 하는 사랑도 완전한 사랑이라고 하기가 힘듭니다. 둘만의 사랑과 내어줌은 폐쇄적이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일치와 조화를 이루어야만 합니다. 서로 하나가 될 때 참된 사랑이 실현됩니다.


이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세 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로 일치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홀로 완전한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하느님께서 삼위일체라는 것은 그분이 사랑 그 자체이기 위한 필연적인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셋이면서 하나이시기에 완전한 사랑 그 자체가 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 사랑 안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이루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삼위일체의 사랑은 개방되어 있으며 참여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사랑은 머리나 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사랑에는 조화와 일치, 그리고 초대와 체험이 함께 있습니다. 그 자체로 완전한 사랑을 이루시지만 닫혀있지도 머물러 계시지도 않은 채 오히려 우리를 향해 그 사랑을 활짝 열어두셨습니다. 보고 맛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로써 삼위일체안의 온전한 사랑은 온전함조차도 뛰어 넘은 채 이제 초월적이면서 위대한 사랑의 장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삼위일체의 사랑의 모습은 우리의 변화를 촉구합니다. 우리도 서로 일치하고 하나가 되라고, 그리고 모든 것을 열어두라고, 또 체험하고 느끼고 내어주는 사랑을 하라고 말입니다.

 

 

 

6월 10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마르 14,12~16.22~26.
김동진(제멜로)|신부, 성정하상성당 보좌


12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3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14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15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16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2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23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26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성체 성혈의 신비에 대한 생각을 하면 늘 두 분의 성직자가 생각이 납니다. 한 분은 미국의 예수회 신부님이신 월터 취체크이고, 다른 한 분은 베트남 출신의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이십니다. 이 두 분의 공통점은 수감 생활을 했다는 것인데요, 취체크 신부님께서는 러시아에 선교하러 가셨다가 체포되어 23년간 강제수용소에서 노동을 하셨고,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은 베트남에서 반체제인사로 체포되어 13년간 독방에서 지내셨습니다.


이 분들이 강제수용소와 독방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성체성사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은 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성냥갑에 성체를 넣어서 성체조배를 하며 힘든 시기를 견디어내셨고, 취체크 신부님은 지독한 배고픔 속에서도 식사로 나온 빵 한 덩이를 가지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성제를 봉헌하면서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체와 성혈에 대한 신심을 가지는 것과 흠숭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인간에게 크나큰 은총과 힘을 줍니다.


성체조배를 통해 감실 앞에 나올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큰 힘을 주십니다. 어떤 분들은 “신부님! 어떻게 성체에 대한 신심을 키울 수 있습니까? 감실 앞에 나아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묻고는 합니다.
예전에 한 사제가 격무로 지친 상태에서 기도시간이 되어 감실 앞으로 나가게 되었답니다. 너무 피곤해서 이런 상태로 성체조배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자문하면서도 해오던 일이기에 그냥 멍하니 감실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 그 경당에는 문이 열려 있었고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사제는 평소에 고양이를 질색하며 싫어했지만 힘이 없어 내쫓지 않고 그 고양이가 하는 짓을 지켜보았답니다. 그 고양이는 성당을 돌다가 그 사제 옆으로 오더니 신기하게도 그 사제의 구두를 베개 삼아 머리를 대고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그 사제는 고양이를 싫어함에도 그 고양이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고 예수님께서도 인간을 그렇게 지켜보신다는 것을 깊게 체험했다고 합니다. 


성체와 성혈에 대한 신심을 키우고 위로받기 위해 무엇보다 우선되는 일은 성체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께서도 성체조배를 하면서 졸아도 된다고 하시며, 인간은 그분 앞에서 아기와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빛〉잡지 애독자 여러분!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고통을 위로 받고 싶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자주 감실 앞으로 나아가서 위로를 받음으로써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깊이 체험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6월 17일 연중 제11주일 : 마르 4,26~34.

이동철(대건안드레아)|신부, 구암성당 보좌


26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 비유를 듣습니다. 하나는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이 뿌린 씨의 성장에 관한 비유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겨자씨에 관한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이 뿌린 씨의 성장에 관한 비유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렸습니다. 그 씨는 곧 싹이 되고 그 싹은 줄기가 되고 그 줄기에서 이삭이 나오고 그 이삭은 낟알을 맺습니다. 낟알이 아름아름 열리면 씨를 뿌렸던 사람은 낫을 대어 수확을 합니다. 그 사람은 씨에서 시작되어 낟알을 맺을 때까지의 과정 안에서 큰 변화는 목격할 수 있지만 미세한 변화들은 목격할 수 없습니다. 즉 씨가 싹이 되고 싹이 줄기가 되고 줄기에서 이삭이 나오고 이삭이 낟알을 맺는 변화는 알 수 있지만 씨가 싹이 되는 과정, 싹이 줄기가 되는 과정, 줄기에서 이삭이 나오는 과정, 이삭이 낟알을 맺는 과정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미세한 과정들을 알 수 없지만 씨를 심으면 낟알을 거둘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정성스레 농사를 짓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이라는 씨가 세례를 통해 우리 삶에 뿌려집니다. 신앙을 잘 가꾸었을 때, 우리는 그 신앙이 우리 삶 안에서 점점 커 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미세한 변화는 느끼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어느 순간 어떤 사건들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크게 느끼고, 그 사랑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 안에서 커가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신앙이 커 가는 과정을 정확히 목격할 수는 없지만 그 신앙을 잘 가꾸었을 때, 이 세상 속에서도 하느님과 함께 하게 되고 마침내 이 세상 삶을 마감했을 때, 영원한 행복에로 들어간다는 진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비유에 나오는 사람이 씨를 뿌렸지만 그 씨를 돌보아주지 않았다면 낟알을 거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의 미세한 과정을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신앙을 잘 가꾸었을 때 우리는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미세한 과정을 알 수 없다고, 즉 보이지 않는다고 무시하면 신앙의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진리를 알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신앙을 잘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을 잘 가꾸어 나갔을 때 우리는 다음 비유에서처럼 눈에 보이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겨자씨의 비유
작은 겨자씨에서 싹이 나오고 가지가 뻗어 나와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서 깃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가 잘 가꾸었을 때, 우리뿐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아름다운 가치들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잘 가꾸었을 때, 우리의 삶 속에서 큰 열매를 맺고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신앙, 그리고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받아들인 신앙을 잘 가꾸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신앙인들이 되도록 노력하며 살아갑시다.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 루카 1,57~66.80.
김기환(미카엘)|신부, 두류성당 보좌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Hic Praecusor Domini Natus est.(여기에 주님의 선구자가 나셨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여드레, 이 아이의 이름은 요한입니다.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좋아하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세상이 묻습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아기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 즈카르야가 사제 직무를 수행하러 성소에 들어와 분향할 때, 그는 가브리엘 천사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3~17)


즈카르야는 아기가 태어나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6~79)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이사 40,3~5)


이 아기는 자라면서 몸과 정신이 굳세어졌고, 백성들은 그를 보며 기대에 차,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루카 3,15 참조) 그런데도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가리켜 증언하기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 3,16)
이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루카 7,24~28)


그렇습니다. 요한은 작은 이가 되었습니다. 누구보다 작은 이가 되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자신을 낮춘 것은, 그에 힘입어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그가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작은 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