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좀 부끄러운 이야기로 인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요즘 전 시간의 여유가 뭔지를 느끼는 특전(?)을 좀 누립니다. 사목방문시기이거나 본당신부 시절과 달리 강론을 별로 안 해도 되는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좀 쉬어간다는 것이 이리 행복하기도 하네요. 대신에 지금껏 해오던 강론 원고들을 뒤적이다가 깜짝 놀라고 창피해서 몇 날을 고심했습니다. 저는 강론이 사제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항상 생각해 왔고 열심히 준비하며 최선을 다했다고 은근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론 참 좋았다.’ 혹은 ‘잘 들었다.’는 인사와 ‘어찌 그리 우리 삶을, 마음을 꿰뚫어 보시냐!’고 감탄해하는 신자들에게 부끄러워하면서도 속으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기억이 새록새록한데, 지금 그 원고들을 보니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뿐이고 허탈한 생각마저 듭니다.
달리 잘할 수 있다거나 건방져서가 아니라, 그 많은 원고 속에는 재미있고 좋다싶은 말이 많기는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살아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말씀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빌려 저의 생각과 삶에 그분을 꿰맞추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집중하고 그분의 모습을 닮고 삶 자체가 전부 그분의 향기를 내어야 하는데 반대로 사람과 세상이, 심지어 지상교회의 건물과 모임이 그 중심에 있고 그리스도는 그 도우미가 된 듯하여 참으로 부끄럽고 허탈한 기분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정의하고, 그리스도는 그 몸의 머리이고 우리는 그 지체라 하면서 “이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신자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이며 신자들은 성사를 통하여 수난하시고 현양 되신 그리스도와 실제로 신비롭게 결합된 것이다.”라고 가르칩니다.(교회헌장 8) 그런데 열심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우리의 삶이 자칫 세상의 한 곳으로 몰두해 ‘그리스도와 실제로 신비롭게 결합된 것’이 아니라 마치 ‘머리 없는 몸만 열심히 사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치관에서부터 세상의 일이 우선시되고 인간의 자기만족이 우선 추구되는 세상을 ‘세속화’된 세상이라 정의할 수 있다면 실상 우리의 교회도, 그 안의 사람들도 너무 ‘세속화’ 된 듯하여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세상살이가 너무 바빠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부족한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오늘의 세상은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어디서나 인정받습니다. 그러려니 시간이 없지요.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바라보고 대화할 겨를은 더욱 없습니다. 그러니 생각은 늘 세상에만 박혀 있습니다. 사람에, 재물에, 편안함에, 화려함에 나아가 칭찬이나 안락함에 박혀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거짓 평화나 거짓 가르침에 이렇게 현혹될까 걱정되셔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또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예수님은 미리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는 많은 시간과 힘을 ‘세상의 것’을 위해 쓰고 있었나 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께로 집중하는 일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더 커지셔야 합니다. 새로운 100년의 새 시대 새 복음화를 시작한 우리 교구의 구성원 모두는 이제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과 이웃을 보고 판단하고 말하는 성숙된 모습으로 거듭나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기위해 그분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대화하는 시간을 더 늘리면 좋겠습니다. 아니 꼭 더 늘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삶의 중심에 오면 가난해도 슬퍼도 고통 받아도 행복하지 않겠습니까?(마태 5,3 이하 참조)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보고 느끼고 손익을 계산하고 자신의 바벨탑을 쌓고 자기만족에 몰두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는 진정한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순간을 더 누려야 합니다. 그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시간을 더 늘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길의 유일한 방정식(方程式)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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