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신앙에세이
우리의 신랑은 누구인가?


연주(마틸다)|수필가, 가톨릭문인회

이 글을 쓰는 나는 지금 하느님의 사랑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인가, 아니면 묵상 글을 쓰는 탈렌트를 주신 주님의 은총은 잊고 그저 나의 재주인 양 나를 드러내기 위한 이기심으로 쓰는 것인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 안에서 물질도 시간도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내 것이 아닌 오직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교회와 이웃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임을 잊지 않고 살려고 노력은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때때로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우리는 자신의 아집으로 그 일들을 밀어붙이면서 그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또는 교회의 뜻인 양 호도하며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볼 일이다. 이런 모습은 분명 그리스도의 향기와는 거리가 먼 행동일진대 그런 중에도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잃지 않으려고 깨어 노력하는 어느 수녀님을 뵌 적이 있다.

수녀님은 신자 수가 비교적 많은 큰 본당에서 수도자로서의 소임을 묵묵히 하면서도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공부방을 운영하고, 성경통독, 영성강의, 노인성경대학 등의 일들도 돕고 계신다. 또 성당에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이웃을 찾아 면담을 하며 그들의 손도 잡아주신다. 무엇을 가지기에 앞서 하나라도 나누려고 먼저 손을 뻗으시는 수녀님은 “공부방을 운영하다 보면 많이 가진 이들이 돕는 경우보다 오히려 어려운 이들이 더 많이 도와주고 있다.”고 들려주신다. 수녀님의 말씀을 들으며 부와 지위, 그리고 잘 먹고 잘 사는 부귀영화와 명예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진정 복음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너’라는 벤치에 예수님이 앉으실 귀퉁이 자리조차도 내어드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 그리고 우리. 이제부터라도 가끔은 교회와 이웃에 비록 작은 것들이지만 내어드리며 살아가자.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우주만물과 아름다운 자연, 아파하는 양심과 사랑하는 이를 보내주시며 모든 것을 주셨는데 아둔한 나는 왜 교회와 이웃에 거저 내어드리지 못하는 것일까? 어디서 배운 욕심에 꽉 찬 셈법인가? 수녀님은 나이가 들어도 카나의 혼인잔치 때의 포도주처럼 퍼주고 또 퍼주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하신다. 그렇다. 이제부터라도 하느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퍼주고 또 퍼주는 포도주처럼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야겠다.

내 선한 의지의 말, 발걸음,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의 신랑이시고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님께 칭찬 돌리고 싶어 오늘도 나를 일으켜 세운다. 우리의 신랑은 누구입니까? 우리를 치장해주는 부와 지위, 편한 삶의 떠나야 할 이집트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주재하시고 찬미영광 받으셔야 할 예수님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