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연중 제13주일 : 마르 5,21~43 사공병도(베드로)|동촌성당 보좌신부
21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우리와 같이 그리스도라는 길을 걷고 있는 어느 신학생의 여정을 잠시 엿보고자 합니다. 신학생이라면 누구나 착한 목자를 꿈꾸듯 그 신학생도 정말이지 착한 목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 착한 목자가 되게 해달라며 늘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신학생은 과연 자신이 착한 목자가 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세상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잘 헤아려줄 수 있으려면 자신에게 사회경험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그 신학생은 부제품을 한 학기 앞두고 휴학신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원의는 허락되지 않았고, 그 결정에 좌절한 그 신학생은 오히려 성소에 대한 회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신학생의 몸에 이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차례의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에 학교는 그 신학생에게 휴학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렇게 휴학권고를 받게 되자, 오히려 혼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착한 목자가 되겠다는 내 원의를 들어 주시는구나. 두세 달 열심히 치료받고 나머지 시간은 사회경험을 해야겠다. 또 그 기간 동안 사제직에 대한 열정과 원의도 다시 찾아야지.’라는 생각에 결국 휴학을 결심했습니다. 휴학한 뒤 그 신학생은 서울로 올라가 두 차례의 수술과 통원치료를 받으며 세 달여 만에 거의 완쾌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사회경험이란 것을 시작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에는 허리가 아파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나머지 시간을 허리치료를 받는데 다 쏟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1년여를 보내고 학교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소중한 시간들을 허비해 버렸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괴로워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여전히 사제직을 향한 열정과 원의를 찾지 못하고 있었기에 다시금 성소에 대한 고민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리던 어느 성체조배 시간, 그날도 어김없이 성체 앞에서 자신의 성소에 대해 힘겹게 묻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이런 기도가 흘러 나오더랍니다. ‘주님, 이제 제겐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제직에 대한 열정마저도 없습니다. 정말 이제 당신밖에 없는데…. 주님, 제발 제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바로 그 순간, 그 신학생은 무언가 ‘뻥!’하고 뚫리는 느낌과 함께 자신이 착한 목자가 되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했던 것은 많은 경험이 아니라 이 한 마디 고백이었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답니다. 바로 이 고백을 듣고자 하느님께서 그러한 시간을 마련해주셨다는 것도 말입니다. 그 후 그 신학생에게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사제직에 대한 열정과 원의가 일렁거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얻은 힘으로 지금 사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회당장 야이로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가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아룁니다. 그의 바람은 오직 하나, 죽어가고 있는 자신의 딸아이가 낫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 그 집에 당도하기도 전에 딸아이의 가녀린 숨결이 끊어졌다는 비보를 듣습니다. 이제 ‘아프던 아이’가 ‘죽은 아이’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바라던 ‘낫게 해 달라.’는 그의 유일한 원의가 쓸모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마저도 어안이 벙벙해진 야이로에게 이미 아이가 죽었으니 더 이상 예수님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야이로를 다독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는 주변 사람들의 불신과 원망어린 시선을 뒤로한 채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소녀를 죽음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처음 야이로가 바랐던 것은 예수님께서 수 없이 행하셨던 ‘치유의 은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보다 더 큰 축복인 ‘소생의 은사’로 답해주십니다. 한순간 자신의 유일한 바람과 모든 수고가 허무로 돌아가는 듯했지만 결국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큰 은혜와 기쁨으로 그를 가득 채워주십니다. 자신의 원의를 고백한 야이로에게 가장 유익하도록 말이지요.
오늘 우리가 마주한 야이로와 어느 신학생에게 그러셨듯이 과연 우리들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며 가장 탁월한 길을 짚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얕고 가벼운 원의마저도 귀기울여 주시고, 결국엔 생각지도 못한 더 큰 은총으로 답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 우리가 보탤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과 기도로 주어진 지금을 견디어내는 것뿐입니다. 나를 통해 펼쳐질 그분의 창대한 업적을 기대하면서 말이지요. 여러분, 혹시 지금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믿고 기도하며 견디어 내십시오. 야이로와 어느 신학생을 넘어 이젠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7월 8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 마태 10,17~22.
황은모(요한)|반야월성당 보좌신부
17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산을 오르다보면 우리는 흔히 내 앞에 먼저 걸어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볼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며 길 위에 남겨준 발자국은 우리가 행여나 처음 가는 길이거나 혹은 아무리 험하고 힘든 길이라 할지라도 방향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고 또 어디에 발을 디디면서 한걸음씩 나아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좋은 표지가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도 걸어가지 않았던 길, 그 누구도 앞서서 걸어간 이가 없어서 발자국과 흔적이 남겨져 있지 않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매우 불안하고 또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한국 교회 최초의 사제이시자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박해와 가난, 불안과 혼란이 가득했던 우리나라 초기 교회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 누구도 걸어간 적이 없는 길을 한걸음 한걸음씩 묵묵히 걸어가야 했던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사제의 길을 걸어가신 분입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님은 개인적으로 사제인 저에게는 제가 걸어가야 할 길과 방향으로 처음 발을 내딛으시고 그 길을 열어주신 분이기에 특별히 감사의 마음을 지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참으로 짧은 시간동안 사제로서의 삶을 사셨고 매우 젊은 나이에 순교의 영광을 얻으신 분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투신하고자 어린 나이에 가족과 고국을 떠나 외국으로 유학을 가셨고 고생 끝에 사제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그 꿈이 크고 또 열정이 넘치셨을까요. 하지만 그러한 당신의 의지와 마음을 겸손하게 내려놓은 채 일찍 순교의 관을 쓰셔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짧은 생애였지만 그분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우리 사제들의 길을 처음으로 열어주시고 그 방향을 알려주시는 데에 있어서는 당신이 보여주셔야 할 모든 것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사제 생활의 참된 진면목은 눈에 보이는 사목적 성과나 활동, 그리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많이 발휘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을 겸손하게 포기할 줄 알고 희생할 줄 알며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희망과 열정으로 살아가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사실 모든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 속에서 때로는 어디로 가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고 무엇이 올바른 방향인지 갈피를 잡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신앙 선조들이 남겨주신 발자국과 그분들이 알려주신 방향을 떠올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고통과 순교로 얼룩진 그 발자국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참된 신앙의 방향은 바로 겸손과 희생,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희망과 열정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되새겨야만 합니다.
7월 15일 연중 제15주일 : 마르 6,7~13. 고태권(그레고리오)|동천성당 보좌신부
7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오늘은 저희 동천성당 주일학교가 방학을 하는 날입니다. 성당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도 많은 주일학교가 이즈음 해서 방학을 할 것입니다. 서품을 받고 첫해 이곳에 와서 지난 겨울 주일학교 방학을 하면서, 주일학교 친구들의 미사 참석률이 확연히 줄어든 것을 경험한 저로서는 주일학교 친구들이 주일학교 방학을 했다고, 미사도 방학을 할까봐(나오지 않을까봐) 내심 걱정입니다. 안타깝지만 실제로 많은 신자 부모님들은 성당의 주일학교를 신앙 공동체의 한 모습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인성교육을 하고 주말을 이용해서 잠시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지는 않나 하는 생각을 가끔합니다. ‘신자 부모님들도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라는 서글픈 결론을 내릴 때가 여러 번입니다. 너무 성급한 걸까요? 어쨌든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연중 제15주일이면서 농민주일인 오늘 교회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잘 들어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외적인 모습과 내적인 권한을 주십니다. 지팡이는 가지고 갈 수 있지만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시지요. 그리고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 이런 모습과 권한을 주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모두가 믿고 떠받드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모르고 예수님의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는 파견된 열두 제자들을 비웃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공간입니다. 바로 그런 곳에 예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이제 파견된 제자들은 세상 안으로 보내져서 세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내적·외적 모습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세상 안에서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라고 당신께서 미리 본을 보여 주신 것이지요.
‘주일학교가 방학하고 아이들이 미사에 잘 참석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저의 걱정은 언제까지 계속 될까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예수님께 파견되어 세상 안에 살아가는 제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러하니 나도 그러하겠다고가 아니라 남들이 그러든 말든 나는 그리스도의 파견된 제자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세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말입니다. 자~준비되셨나요? 그러면 갑시다. “가서 복음을 실천하러요!”
7월 22일 연중 제16주일 : 마르 6,30~34. 이수환(바오로미끼)|구미 원평성당 보좌신부
30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파견으로부터 돌아온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고 하십니다. 이 외딴곳은 어떤 곳이며 무엇을 하는 곳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외딴곳은 쉬는 곳이며 또 기도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종종 외딴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지요?(마르 1,35 ; 루카 5,16 참조)
쉼과 기도가 있는 그곳이 외딴곳입니다. 왜 쉬는지, 왜 기도를 하는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더욱더 사랑하기 위해서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것은 외딴곳에 머물고자 하는 이유를 찾는 게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 외딴곳은 어디인가입니다. 쉬기 위해서 떠났는데 돌아왔을 때 더 피곤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또 휴가라고 다녀왔는데 더 피곤했던 경우를 한두 번쯤은 경험하지 않으셨나요? 그런 경우 외딴곳에 머물렀다고 할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장소, 프로그램이 아니라 ‘내가 쉬고 있는가?’, ‘내가 기도하고 있는가?’입니다.
내가 쉬고 있음을 느낀다면, 내가 기도하고 있다면 그곳이 바로 외딴곳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충전하는 곳이지요. 어떻게 해야 외딴곳에 머무를 수 있을까요? 한 번 찾아보도록 하셔요.
7월 29일 연중 제17주일 : 요한 6,1~15. 조재근(마르코)|월성성당 보좌신부
1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본당에 이제 갓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기쁘게 살아가는 아마추어 사진작가 자매님이 계십니다. 교리수업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평일미사에도 매일같이 나오며 예비신자 때부터 남달리 열심히 하셨습니다. 하시는 일에 걸맞게 예비신자 때부터 성당의 크고 작은 행사에 카메라를 들고 오셔서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주일학교 행사나 어린이 미사, 그리고 첫영성체 가정교리 행사가 있을때면 육중한 카메라를 든 자매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인화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시고요. 처음에는 왜 저렇게 나서서 사진을 찍으시는 것인지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재능을 이웃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이해되면서 참 고마웠습니다. 첫영성체 가정교리 가족 성지순례 때에는 사진기사로 봉사해 달라고 부탁까지 해서 모셔 갔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봉헌해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요즘에는 재물만이 아니라 이렇게 자신이 가진 재능을 기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재능을 나누지 않고 자기만 갖고 있으면서 썩혀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이웃과 나눌 때 쓸모있는 아름다운 재능이 됩니다. 재물 역시 마찬가지겠죠.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안드레아의 눈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하찮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9절) 하긴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었는데 겨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이 소용이 있어 보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대체 이것으로 무엇을 하시려는 것인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주셨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아이가 내어놓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우리도 내가 갖고 있는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소용이 없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주님께 기꺼이 내어놓을 때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놀라운 일을 하시는 데 쓰실 것입니다.
이 한 몸 주님의 도구로 내어 드렸더니 주님께서는 사제로 만들어 주셨고, 미사 때 성체성사를 이루도록 해 주셨습니다. 오늘 미사 때도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며 성찬례를 거행하였고, 많은 교우들에게 생명의 양식인 성체를 영해 줄 수 있었습니다. 부족한 저를 놀라운 도구로 써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성체성사의 삶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주님께서 성체를 모시는 우리를 나누고 베푸는 삶으로 변화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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