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인데도 벌써 거리에는 피난민들이 남으로 남으로 걷고 있었다. 서로 비슷한 모습에서인지, 정다운 인사는 없어도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었는지, 쉽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수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간밤에 인민군 트럭이 많이 왔다고 한다. 아까 집을 나서면서 들리던 폭격소리는 그 트럭을 폭격한 것 같다고들 말한다. 그런저런 말을 들으면서 해가 뜨기 전에 우리는 한 발짝이라도 더 멀리 가려고 길을 재촉했다.
수녀님들은 앞에 가면서 행여나 있을지도 모르는 비상사태에 연락하기 위해서 수시로 뒤를 돌아보면서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해가 떠서도 한참을 가다가 점심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 오산 부근의 어떤 학교 담장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나는 땅만 보고 묵주기도를 하면서 걸어갔다. 그 시간에 수녀님들이 앞에서 나에게 검문소가 있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땅만 보고 걷느라고 수녀님들의 신호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걷고 있던 담장 한 쪽이 갑자기 뻥 뚫린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담장이 폭격에 맞았는지 부서지고 담장 안으로는 학교 같은 건물이 보였다. 그 건물 현관에서 길을 향해 인민군 대여섯 명이 총을 들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긴장하여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담장이 무너진 사이로 보았지만, 내가 선 곳은 바로 대문 기둥 옆이었다. 뒤로 가자니 무너진 담 사이로 내가 보일 것이고, 앞으로 가자니 대문 쪽을 향해 앉은 인민군들이 나를 쳐다볼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 서서 있을 수는 더더구나 없지 않은가!
그러던 순간, 바로 기둥 옆에서 보초가 총을 메고 왔다 갔다 하는데, 총부리가 내 눈 앞에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그 때, 지나가는 두 사람의 남자가 내 눈 앞에서 불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 이제는 살아남을 길이 없구나! 하느님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도저히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겠구나!’하고 생각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주님,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신부도 될 수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성모어머니, 저를 도와주소서.’하며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첫발을 내디디면서 다리를 들었는지, 내가 걷고 있는지, 가만히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며 ‘성모님! 성모님!’만 되뇌면서 걸었다. 불과 10m 넓이의 대문을 지나고 또 시작되는 담장 옆에서 수녀님들을 보았더니 넋을 잃고 주저앉아 있지 않은가! 주저앉은 수녀님들이 일어서기에 같이 바쁜 걸음으로 학교 담장을 돌아서서 인민군들의 시야를 벗어났다. 학교 대문 앞을 지나오면서 긴장을 한 탓인지 한참 걷다가 오히려 전신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인간은 아무리 어려운 경우가 생기더라도 생리적인 현상에는 어쩔 수 없는 본능의 힘에 끌리는 모양이다. 조금 아까 그렇게 어려웠던 순간에도 불구하고 힘이 빠지니까 앉고 싶은 생각과 아침도 못 먹고 종일 걸었더니 배고픈 생각이 더 앞섰다. 지금 내 상황은 앞뒤로 인민군이 우글거리는데 계속해서 긴장을 해야겠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배는 고팠다.
한참을 걸어 저녁 무렵, 지금 기억으로는 서정리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시장기도 생기고 쉬어도 갈 겸 거리에 큼지막한 집을 골라 대문을 보니 열려 있었다. “실례합니다.”하고 들어갔더니 인기척이 없다. 중문을 들어서니 마당이 크고 시원스럽게 넓은 대청마루가 바로 보인다. 대청 한가운데 나이 70이나 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곱게 머리를 단장하고 앉아서 “어서 오십시오.”하며 미소 짓는다. “서울에서 충청도로 피난 가는 사람들인데 다리도 아프고 해서 좀 쉬어가고 싶은데 허락하시겠습니까?”하고 사정을 했더니 “나 혼자 집을 지키고 있으니 마음대로 쉬어가시오.”하며, 며칠 묵어가도 좋다고 하신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집안 식구는 모두 피난 가고 할머니 혼자 집을 보고 계신단다.
우리는 쌀을 조금 가져왔기 때문에 부엌을 빌려 밥을 해먹으면서 할머니도 같이 먹자고 했더니 별로 생각이 없다고 하시면서 처음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 말씀이 “어떻게 부인네가 일곱 명이나 되면서 어린애가 한 명도 없습니까? 그리고 집안은 어떻게 되었는지 부인들만 같이 가십니까? 젊은 청년은 어떻게 되는 사람입니까?”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내가 “저기 저 분이 내 누님이고 다른 분들은 친척 아주머니들이고 조카들입니다. 피난을 같이 못 떠나고 집에 있다가 우리끼리만 따로 서울을 떠나 친척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하고 이야기하면서 누가 내 말을 믿겠느냐만 안 믿어도 할 수 없는 일이고, 더 이상 밝힐 수 없는 처지가 아닌가 생각했다. 우리끼리 성당 종각이 보인다고 이야기하니까, 할머니께서 들으시고 “우리 신부님도 피난 갔습니다. 사실은 나도 신자입니다. 식구들과 같이 피난 갈까도 생각했지만 이 집을 그냥 비워둘 수가 없어서 나만 남아 있겠다고 해서 혼자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 이상 대화는 없었지만 할머니는 아마도 수녀님들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자고 가라는 할머니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지금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정리에서 과히 멀지 않은 동네에 한밤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딘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정확히 안다 하더라도 지금 동네 이름을 적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동네에 가서 너무나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네에 들어서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곳에 찾아가서 하룻밤 자고 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피난민들 때문에 사람 못살겠다. 밤중까지 와서 방을 내놓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란 말이냐?”하기에 “방이 없으면 동네 헛간이라도 좋으니까 좀 안내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안내받은 곳이 농기구 같은 것을 넣어두는 동네 헛간 같은 곳이었다. 우리를 안내한 사람이 조금 기다리라고 하면서 서 있는 우리들의 앞을 지나 자기 집에서 멍석을 지고 왔다. 멍석에 다 드러눕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엉덩이라도 붙일 곳이 있고 머리 둘 곳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종일을 걸은 다음이었지만 목욕은 고사하고 마실 물도 없어 두레박을 얻으러 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거절당했다. 하는 수 없이 멍석을 가져온 사람 집을 찾아가서 물을 얻어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 동네 인심같이 모기는 사정없이 덤벼들어서 밤새 거의 자지를 못하고 새벽 4시에 또 우리는 예산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걷기가 이렇게 힘든데, 어려운 고비가 덜할 때에 수원에서 친구 서원식과 헤어진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그의 사촌 형이 와서 자전거로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우리와 똑같은 고생을 했었을 것을….
신창 근처에 왔을 때 수녀님 한 분의 친척이 사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분들 역시 피난 가버리고 아무도 없었고 그 집과 잘 아는 한 분이 오시더니 하룻밤 묵어 갈 수 있다고 자기 집에 가자고 하셨다. 우리는 그 집으로 가서 마당의 멍석 위에 앉아 들어오라는 소리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청년이 오더니 앉아계신 수녀님들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더니 내 곁에 앉아 조그맣게 “혹시 수녀님들이 아니냐?”고 묻는 것이었다. 혹시 인민군과 내통하는 사람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지만 “수녀님들 맞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천주교 신학생입니다.”하고 똑바로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그 순간, 그 청년은 덥석 나를 껴안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싸웁시다!”하며 자기는 개신교 신자라고 했다. 내 생전 개신교 신자가 그렇게 반가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하룻밤 대접을 받고 또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큰 길이 아닌 산길을 택했고 바로 가기보다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길을 택했다. 서울을 떠나 한 주일 내내 걸으면서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했지만 이제 예산이 눈앞에 있다고 하니, 너무나 반가웠다. 예산에 도착하여 내 친구 서원식 집을 지나 윤을수 신부님 댁이 있었기 때문에 서원식 집 앞에서 각자 헤어졌다.
예산 오리동 서원식 집에 들어가니 그 어머니가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마치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나를 반기시듯 맞아주셨다. 그날부터 마음 놓고 쉴 수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와 달랐다. 서원식의 집은 원래 정미소를 경영했다. 그러자니 충실한 일꾼이 필요했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 정미소를 맡아서 자기 일처럼 해주는 의리 있는 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일꾼이 그 동네 인민위원장이 되었다. 주인집 아들을 의용군에 보내지는 않았지만 타지방에서 온 나는 의용군 보낼 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서울을 떠나 한 주일 내내 굶으면서 걸어서 여기까지 살려고 왔더니 이제는 의용군에 제대로 붙잡혀 가게 생겼다. 며칠을 두고 보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아서 그 집을 또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예산에는 김환규라는 북한에서 온 신학생이 한 분 계셨는데 북한에서 신학교를 다니다가 해방이 되자 학교를 못 다니고 남한에 내려왔다. 서울 신학교에 다니다가 몸이 아파서 예산에서 쉬고 있었다. 그 신학생과 서원식과 나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를 의논하게 되었다. 같은 동네에 원안나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서원식과는 친한 사이였고 그 집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스무살 되는 안나 밑으로 다섯 형제와 살고 있었다. 동네에서도 그 집에는 남자 어른이 없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 집에 숨어사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내가 서원식의 집을 떠났다는 것을 알아야 했고, 그러나 내가 원안나의 집에 들어갔다는 것은 아무도 몰라야만 했다. 그랬기 때문에 저녁밥을 먹고 먼 길을 떠나야 한다고 소문을 내고 저녁 먹기 전, 거리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 집 옆으로 돌아서 원안나의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내 신발은 아예 치워버렸다. 그날 밤부터 9.28 수복까지 그 집에서 숨어살면서 겪은 어려움을 어찌 다 설필로 말하리오!
그 집에 동네 사람들의 왕래가 있기 때문에 비록 인민군과 연관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집에 남자가 있다. 누군가?’등의 말이 나오게 되면 결국, 조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 집에 사는 아이들한테야 하는 수 없었지만 동네 사람이 왕래할 때에는 눈에 뜨이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마루 밑에 방공호를 파서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마룻장을 덮으면 보통 때와 다름없는 마루가 되지만 밑에서 열고 나올 수 있게 만들었다. 마룻장을 뜯고 방공호를 파려고 하니 좁아서 곡괭이와 삽질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 왕래가 없는 밤에 대문을 잠그고 호미로 흙을 긁어모아 마당 밭에 뿌렸다. 밤에는 밖에 나왔지만 아침만 먹으면 방공호 속에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갑자기 인민군 전령이 집 대문을 두드렸다. 지나가던 큰 부대가 예산에서 하루 쉬어간다고 하며 인민군들은 각 소대별로 각 집에 들어가서 민박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단다. ‘이 집에도 들어올 테니 그렇게 알고 준비하라.’고 하고 나가버렸다. 우리는 물론 방공호에 들어가겠지만 우리가 들어가 있는 마루 위에 인민군들이 수십 명 잠을 잔다니 기절할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그 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에게 말을 건네려고 하지 말고, 밥을 주려고도 하지 말고 인민군들이 떠날 때까지 모른 척 하라고 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문간에 수십 명의 인민군들이 들이닥쳐 각각 방에 들어가 눕고 십여 명은 우리 머리 위에 드러누웠다.
생각해보라.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마루 두께 3cm 바로 밑에 우리가 숨어 있고 그 위에 인민군들이 드러누워 있으니 재채기나 기침소리만 나도 큰일 나지 않겠는가! 방공호에 구부리고 앉아서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드러눕자마자 인민군들은 코를 골면서 자기 시작했고 불침번은 원안나 어머니와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 집의 식구가 몇이며, 누가 사는지 등등을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내일 아침에는 인민군인 우리가 머물기 때문에 집 전체 수색을 해보아야겠다는 등등.
하느님은 우리를 그냥 버려두시지 않으셨다. 20분도 채 되지 못하여 다시 출발한다는 연락병의 소리가 들리더니 “기상!”이라는 소리와 더불어 짐과 총을 챙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가 9월 중순 경이어서 인민군 전체가 낙동강 작전 이후, 후퇴하기 시작하는 그 시기였다. 후다닥거리며 그들이 떠난 다음, 우리는 마룻바닥을 열고 나와서 또 한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숨을 돌릴 여유도 없이 이번에는 동네 청년들이 찾아왔다. 그때까지 성당을 인민군들이 사용하고 있었는데 후퇴를 하면서 거기 있는 인민군도 다 떠나버렸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성당 물건을 마구 들고 가니 우리가 가서 좀 지켜 달라고 한다. 알고 보니 동네 청년들은 이미 우리가 그 집에서 숨어살고 있었다는 것을 두 달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청년들을 따라 성당 마당으로 갔다. 그리고 달 밝은 밤 성당 마당에서 처음으로 큰 숨을 들이쉬며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 순간, 불쑥 숲에서 인민군이 “손 들어!”하면서 뛰어나왔다. 뒷걸음질치면서 보니, 인민군 두 사람이 따발총을 들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잡히면 죽는다 싶어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따발총 따다닥거리는 소리가 나고, 우리는 아무 집이나 울타리를 휘젓고 들어가려고 하니 안에서는 개가 짖는데 그 집이 마침 옆 동네 인민위원장 집이었다. 나를 먼저 들이밀던 친구는 그 말을 하자마자 다시 나오라고 끌어당기고, 우리는 손이 가시에 찔리면서 뒷걸음질쳐 나와 도망가기 시작했다.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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