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은 다양성과 다문화주의와 관련한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사명을 드러내고 있다. 먼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다양성 안에서 이루시는 일치를 보여 주시며,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통하여 이방인으로 사셨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였지만 이방인을 찾아가시고 모든 이와 일치를 이루시길 갈망하셨을 뿐 아니라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당신과 일치시키셨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이 세상의 이방인으로 당시 사람들의 배척을 받으셨지만 이방인들을 찾아 주셨다. 이제 그분의 신원과 삶에서 이방인과 관련된 사항들을 살펴보자. 그분의 삶 자체가 다문화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삶의 기준을 제시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1.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은 위격으로 서로 다르시지만 한 분 하느님이시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근원적 신앙이다. 비록 구원의 역사에서 하느님은 성부로, 성자로, 또 성령으로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지만 한 분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다양성 안에서 이루시는 일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와 한 분이시며, 아버지의 파견을 받으신 분으로 세상에 속하신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기에(참조. 요한 14,11) 성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며, 그분의 파견을 받아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참조. 요한 12,44-46)
이와 같이 예수님은 아버지에 속하시며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신 분으로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분(참조. 요한 17,14.16)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의 강생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며 빛 자체이신 분이 어둠의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본성상 하느님이신 분이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필리 2,7) 인간이 되신 분이시다. 곧 예수님은 당신의 본성마저도 감추시고 당신의 본성과는 완전히 다른 이 세상에 오신 분, 달리 말해서 하느님이신 성자께서 유한하고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고자 인간의 몸(육)을 선택하신 것이다. 이 선택을 통해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의 만남, 완전히 다른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달리 말해서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이방적인 두 본질(신성과 인성)의 일치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예수님은 존재론적으로 인간인 우리와는 다른 이방적인 존재이시지만 인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 분이시다. 이 일치가 인류의 구원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인간과 완전히 다르신 분이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치의 근원이시다.
2. 이방인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참조. 요한 1,11) 세상은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참조. 요한 1,10), 이 세상을 구하러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나그네의 삶, 이방인의 삶을 몸소 겪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정책에 따라 호적 등록을 하러 가던 중에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아기를 낳았다. 성가정이 들어갈 여관이 없어서 예수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야 했다.(참조. 루카 2,1-7) 예수님은 타향에서 이방인으로 태어남으로써 최초의 이방인 경험을 하게 된다. 탄생 직후 성가정은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헤로데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이집트로 피난하게 되었고, 헤로데가 죽자 성가정은 유다로 가지 않고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가서 살았다.(참조. 마태 2,13-23)
성가정이 이집트 피난과 나자렛으로의 귀환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로의 피난과 탈출을 연상시켜준다. 성가정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해방되면서 겪었던 것처럼 이방인이며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 파스카 축제 때 가족들과 함께 참여하였고, 축제 후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예수의 부모들은 사흘 동안 예수를 찾아 헤매면서 이산가족의 아픔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린 예수님은 공생활 동안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하셨다. 또 예수님의 설교와 기적은 길에서, 산 위에서, 물가에서 이루어졌고 극히 드물게 회당에서 이루어졌다. 또 그분은 필리스티나(유다, 갈릴래아, 사마리아)와 국경 너머까지 끊임없이 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선포하였다.(참조. 루카 8,1) 이와 같이 예수님은 공생활에서 정착된 삶을 사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이웃 고을들을”(마르 1,38) 찾아 다니셨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유랑 생활, 정처 없이 떠도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사도들도 예수님의 이러한 삶에 동참하였다.
3. 배척당하신 예수님
배척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같은 민족인 유다인으로부터 사마리아인으로 또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받았다.(참조. 요한 8,48) 예수님이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시자 고향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하였다.(루카 4,16-30; 마태13,54-58; 마르 6,1-6) 그리고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 길 잃은 양들보다 못한 민족인(마태 10,5-6) 사마리아인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가 10,29-37)를 통해 그들을 참된 이웃의 본보기로 삼았고,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그 마을에 이틀을 머무르시며(요한 4,1-42) 호의적인 태도를 드러내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 머무실 곳을 찾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맞아 들이지 않았다.(루카 9,51-56) 또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부활에 관한 논쟁(루카 20,27-40; 마태 22,23-33; 마르 12,18-27)을 벌였고,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각종 율법과 관련된 사항들(단식과 안식일 등 각종 율법) 때문에 논쟁하였다.
바리사이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 고소하기 위하여 간음한 여자를 데리고 왔으며 심지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함께 모의를 하였다.(마태 22,15)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를 했으며(마태 26,3), 체포하기 위해 칼과 몽둥이를 든 큰 무리를 보냈다.(마태 26,47) 예수님이 체포되자 제자들마저도 그분을 버리고 도망을 갔고(마태 26,56) 붙잡힌 예수님은 군사들로부터 조롱당하고 채찍질당하였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꼬임에 빠진 군중들은 빌라도 앞에서 말씀과 기적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선포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22-23)라고 외쳤다. 또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수석사제들, 군사들, 심지어 함께 못 박힌 죄수마저도 조롱하였다.(루카 23,39)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탄생으로부터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셨다. 그분이 배척당하신 것은 그분에게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을 못 알아보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철저히 배척당하시면서도 인류를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당신 자신을 철저히 내어 놓으심으로써 인류를 당신에로 이끄시어 일치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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