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3년 전, 평생 몸담았던 모 공영방송에서 정년퇴직하여 지금은 본당사목위원으로 봉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아지니 그동안 하지 못했던 책읽기, 취미생활 등을 하면서 여유롭게 보내고 있습니다. 그 중 교리신학원에 등록하여 공부하는 게 정말 보람되고 재미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로 살아오기는 했지만 제가 지금까지 가톨릭 교리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새삼 느끼면서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리신학원의 수업은 본당에서 교육위원장으로 봉사하는 저에게 꼭 필요한 가톨릭교회에 대한 이해와 이론들을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사론 과목은 본당 미디어 교육자료 제작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비록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저희 가정은 온전한 성가정은 아니었습니다. 할머니가 성당에 다니시다 보니 자연스럽게 며느리인 어머님이 다니셨고 사촌들도 모두 성당에 나가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술을 좋아하시고 또 방랑벽이 심하셨던 아버님이 따로 살림을 차려 이복형제들이 생기는 등 그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저희 집은 따뜻한 보금자리와는 거리가 먼 가정이었습니다. 가끔 가정을 거의 팽개친 가장의 폭력이 행사되면서 어른들의 악다구니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보릿고개 가난에 전 국민이 어렵게 지낼 때는 그보다 더 심한 가난의 삶을 살았던 우울한 세월 속에서 유일하게 어린 내 삶을 이끌어 준 곳은 성당이었습니다.
프랑스 신부님의 사랑을 받아 가면서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새벽미사 복사를 빠지지 않고 다녔던 모습은 결코 잊히지 않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었습니다. 가장이 자식들의 양육과 교육을 포기한 상태에서 저는 자퇴와 검정고시를 거듭하면서 사회생활에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삶 속에서 쉽게 접근해 오는 악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 들지 않고 바른 사회인으로 성숙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 성모님의 돌보심과 하느님의 사랑 덕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공무원 첫 발령지인 어느 시골에서 저는 직장생활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남자라면 누구든지 예쁜 여성을 원하듯이 저는 하느님께 청원했습니다. 사회생활 진입 첫 소원으로 예쁘고 멋있으며 착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순탄치 않았던 성장기의 삶에 대한 반대급부적인 청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 가당찮은(?)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그 해 우연히 만난 그 여인은 엄청난 미인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동료 직원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내 모든 일상은 그녀뿐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을 훔치려고 밤을 새워 연서를 메워나갔던 밤들, 기꺼이 사랑의 배달부가 되어 준 동료 직원들, 그리고 첫 데이트! 아, 그 때의 추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뜁니다. 드디어 혼담이 오가고 양가 부모님들의 허락도 받았습니다. 어딜 가든 예비신부의 미모가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서구형 이목구비에 어느 것 하나 결점이 없는 미인이었습니다. 그 생각은 35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약혼을 하고 그제야 혼인성사 문제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혼인성사를 받기 위해 이제 저의 약혼녀가 된 그녀가 교리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절에 다니고 계시던 장인, 장모님이 그 옛날 밀가루 선교 시절에 성당에 다닌 일이 있었다는 주위 사람의 말에 혹시나 해서 성당 사무실에 확인해 보니 그녀는 이미 유아세례를 받은 신자였습니다. ‘릿다’라는 그녀의 외모에 극히 어울리는 세례명으로 말입니다. 저는 감동했습니다. 이건 정말 하느님의 은혜이며 하느님이 제게 주시는 풀코스의 사랑이라고! 하느님께서는 제 소원을 완벽하게 들어주셨습니다. 결혼 후 주위의 축복과 부러움 속에서 그곳에서 2년간 꿈같은 신혼생활을 보내고 이제 어머님이 계신 이 곳 도시로 돌아와 근무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저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은 그 이후로도 계속됩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새로운 신접살림이 시작되었습니다. 형수님과 마음이 맞지 않아 같이 살 수 없었던 어머님을 저희들이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그 미모에 걸맞게 마음도 착해서 시어머니를 친정어머니같이 모셨습니다. 며느리가 곱게 차려준 옷을 입고 성당에 다니시는 행복한 어머님의 모습은 우리 본당의 화젯거리였습니다. 당시 본당 신부님께서는 아내더러 천사라는 과찬의 말씀을 하셨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어느 해에는 본당에서 수여하는 효부상도 받았습니다.
아내가 어머님과 함께 한 22년이 지난 2002년, 어머님은 90세의 나이로 며느리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눈을 감으셨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님의 유품을 그대로 사용한다거나, 어머님이 입으시던 스웨터를 따뜻하다며 지금도 입고 있는 아내를 보면서 어머님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함께 고부간의 다정했던 모습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희 두 딸들이 요즘 아이들답지 않게 할머니를 잘 따르고 정다웠던 것도 모두 어머님에 대한 아내의 공경과 사랑 덕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토록 큰 사랑을 평생 제게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교만한 마음으로 자기중심으로만 살았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화를 내고 욕하기도 했습니다. 멸시하기도 했습니다. 배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후회와 두려움이 밀려오면 저는 뻔뻔하게도 하느님께 변함없는 사랑을 요구하곤 했습니다. 모든 게 엊그제 일이었던 것 같은데 3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러가고 이제는 저희 둘만 남아 서로 바라보며 단조로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이 더 좋다며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 주는 아내가 있기에 행복합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저를 사랑해 주는 아내를 딸들은 연구대상이라고 놀리며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아내의 이런 헌신적인 사랑은 바로 제게 내려주신 하느님의 큰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저의 조그마한 일탈에도 하느님께서 눈을 부릅뜨고 내려다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반성하려고 합니다. 결혼 전 하느님께 청했던 소원과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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