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지인과 함께 운동을 다녀오니 남편은 밖에 나가고 없었다. 혼자 점심을 먹으라는 메모 를 남기고 나간 걸 보니 아마 약속을 한 외출임이 짐작된다. 대강 한 술 떠먹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데 졸음이 쏟아진다. 어제 천호성지를 다녀온 피로가 겹친 탓인지 비스듬히 누웠는데 깜빡 잠이 들었던가 보다.
비몽사몽간에 초인종이 울렸다. 잠결에 깨어 보니 현관 개폐기에 낯선 젊은 새댁 둘이서 초인종을 계속 누르고 있는 게 아닌가. 낮잠을 즐기고 있던 터라 그냥 못들은 양 있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고 있다. 텔레비전의 소리가 바깥까지 들린 것인지, 사람이 있다는 걸 감지한 것인지 계속 문을 두드렸다.
오래 전 꼭 이런 상황에서 문을 열어줬다가 한나절을 넘게 성경을 꺼내어 설명하기에 질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현관으로 다가가서 누구냐고 물으니 교회서 왔다기에 돌아서려고 하는데 잠깐이면 된다며 또 문을 쾅쾅, 이번엔 더 세게 두드린다. 살짝 화도 난 터라 문을 열고 성당에 다닌다며 “사동성당 교우의 집” 문패가 보이지 않느냐며 가라고 하는데, 한 여자의 한쪽 발이 이미 문 안쪽에 들어와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밀어내고 문을 닫아버렸다. 나의 과민반응이었다.
자리에 와 앉으니 통쾌함보다 금방 후회가 되었다. 상대는 젊은 새댁이 아닌가. 주님께서 나의 행동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또 저 사람들이 나가서 성당에 다니는 나를 두고 어떻게 평가할까? 금방 취한 내 행동에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암 수술 후 다시 태어나게 해주신 주님께 여생을 겸손과 남을 사랑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게 해달라고 빌었던 평소 나의 기도는 이 짧은 순간에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역으로 그 사람들을 나의 신앙으로 이끌어 들일 기회일 수도 있었는데 상대에게 온화한 성모님의 손길로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움직였다면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늙은이인가!’라는 비웃음이 뒤통수를 때린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젊은 새댁들의 대담한 선교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종교가 다른 줄 알면서도 기를 쓰고 자기네 종교로 끌어 들이려는 막무가내식의 방문 선교가 더욱 그랬다. 사실 해마다 판공성사표를 배부하려고 쉬는 교우 집을 방문할라치면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눌러도 문을 열어 주지도 않은 채 그냥 두고 가라고 하는 젊은 새댁들의 야멸찬 목소리에 두 말하지 않고 돌아왔던 내 모습과는 아주 대비가 된다. 주위에 널려 있는 게 쉬는 교우들이다. 다가가서 왜 요즈음 성당에 보이지 않느냐며 바쁘더라도 나오시라고 말을 건네면 냉랭한 반응에 그만 입이 붙어버린다. 하느님을 알고 있는 쉬는 교우들을 회두 시키는데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더 가깝게는 가족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는가.
십자가 고상 앞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 ‘당신의 딸 스콜라스티카, 하느님 나라에 가는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님을 압니다. 저에게 지혜를 주시어 시련과 고난의 길도 참 나의 길임을 일깨워 주시어 하느님의 맞갖은 딸이 되기를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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