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미사에 갔다. 맨 앞 오른쪽의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옆자리의 여자에게 인사의 말을 건네었다. 바라만 볼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무시를 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한 청년이 들어오더니 여자에게 어떤 손놀림을 하였다. 여자도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손놀림을 했다. 마음의 표현 같았다. 그 손놀림은 바로 말을 못하는 농아(聾啞)들의 수화(手話)였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는 농아들을 위해 비워놓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얼른 짐을 챙겨들고 다른 자리로 옮겨왔다.
나는 왜 그들 곁을 쏜살같이 떠나와 버렸을까. ‘나는 말을 못하는 농아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내가 있을 자리는 말을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자리가 아니다.’, 즉 ‘나는 그들과 같지 않다.’라는 생각 때문에 건강한 사람들 곁으로 빠르게 와 버린 것이 아닐까.
미사가 시작되었다. 입당송을 불렀다. 그들은 입으로 성가를 부르는 대신 손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하늘이라는 말이 나오면 손을 들어 머리 위를 가리키고 마음을 나타낼 때는 두 손을 가슴에 포갠다. 기쁨을 표현할 때는 손을 나부낀다. 그들은 하늘을 향해 앙망하는 눈빛을 띄우고, 두 손만을 사용하여 절실하게 기도하고 있다.
미사 중, “옹기장이 손으로 빚어진 우리”라는 성가를 불렀다. 옹기장이 손으로 빚어진 우리는 한 개의 그릇이 되어 이 세상에서 각각의 몫을 하며 살고 있다. 어떤 그릇은 몸에 유익한 음식을 담기도 하고 어떤 그릇은 화려한 꽃을 담기도 하고 또 어떤 그릇은 빈 그대로 가만히 있다. 창조주의 의도대로 빚어진 존재라면 말을 못하는 농아들의 그릇 빚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농아자들의 자리를 다시 바라본다. 그들이 한평생 짊어지고 있는 침묵의 무게를 생각한다.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안타까움, 그 고통의 깊이를 생각한다. 표현의 통로를 잃고 어둠속에 갇혀있는 절망, 그 슬픔을 생각한다. 그들의 가슴을 쾅쾅 두드려 잠겨있는 소리의 문을 열어주고 싶다. 가슴 밑바닥에 침잠되어 있는 아름다운 언어들을 건져 올려주고 싶다. 닫혀진 입에서 마침내 샘물처럼 솟아오를 말들, 그 놀라운 기적을 한 번 보고 싶다.
미사가 끝났다. 퇴장성가를 불렀다. 우리는 소리로, 농아자들은 손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나는 입을 다물고 그들이 표현하고 있는 손의 기도에 동참해 보았다. 눈물 같은 아픔과 감미로운 환희가 함께 밀려온다. 그 환희가 축복일까. 마침내 깨닫는다. 입으로 바치는 우리의 기도보다 손으로 바치는 농아들의 기도가 더 윗길에 있음을, 그들의 열렬한 손의 기도가 공허하게 소리치는 우리의 기도보다 더욱 하느님께 다가가 있음을, 그들의 안타까운 손짓이 우리 기도의 구멍난 부분을 채워주는 끝 장식임을 깨우침 받는다.
앞으로 나는 농아자들의 미사에 자주 참례하여 그들이 바치는 손의 기도에 함께 동참하고 싶다. 세상에서 질러대는 아우성 때문에 상처받고 있는 마음을 위로 받고 싶다. 농아들의 침묵 곁에서 진정한 소리의 참 의미를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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