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토론회가 종종 열립니다. 그런데 이런 토론회에서 문제를 들여다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문제점을 파악하고 비판하여 잘못된 점을 지적해내는데 요즘엔 일반인들도 시사전문가 못지 않은 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판의식은 날카롭습니다. 그렇다 해서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정의롭다거나 건전하거나 행복지수가 높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날카로운 비판 의식 때문에 어두운 것을 더 잘 보게 되었고 그 때문에 더 불행하다고 느끼며 사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떤 면에서 좀 덜 예리한 시각을 가지는 편이 행복한 삶을 사는 데 나을 듯 보이기도 하고, 더 적극적으로는 긍정적인 면을 파악하고 지지할 줄 아는 것이 정의롭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가꾸는 길이 아닌가 싶어지기도 합니다.
가정생활 속에서 문제를 겪고 있는 많은 부부들이나 부모들은 문제의 근원을 서로가 잘못하고 있는 것에서 찾아내고 그 문제점들에 직접 도전해서 해결하려 합니다. “우리 남편은 집에 조금만 일찍 들어오고 관심을 보인다면 좋겠는데 그게 문제야.”, “우리 아들은 아침에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면 좋을 텐데 그게 문제야.” 이런 식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고치려 덤벼듭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경험하듯이 그런 문제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적이나 비판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게 되고 결국 포기하거나 더 이상 얘기 하지 않고 피해버리게 되고 가정의 행복은 꿈의 이상으로 밀려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가족상담을 청하는 많은 이들이 서로에 대한 문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방이 변화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문제는 변화되지 않으려는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문제를 가진 측이 변화되려 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그대로 있게 되고 개선의 여지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항상 문제점만을 보게 하는 그 눈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전체적으로 하나인 인간(whole person)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 문제가 그 사람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문제에 매여 버리고 나중에는 결국 문제점만을 보는 시각만 남게 됩니다. 전체적인 인간은 여러 가지 면들이 어우러져서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하나의 인격입니다.
사람이 전체적으로 다 부정적일 수 없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좋게 보셨던 대로 긍정적인 면들도 인성의 나약함과 부정적 삶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단점들과 함께 그 사람의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비판하고 평가할 때 이 모든 것 중에서 우리는 혹시 어느 한 부분을 부정해버리고 한부분만을 선택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부정적인 면 자체를 파악하고 고치려 하다보니 긍정적인 면은 보지 못하고 상대방이나 자신을 고칠 것이 너무나 많은 존재로 파악하게 되기도 합니다. 또한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고 도전하는 것이 오히려 자아를 공격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어 방어기제를 발동하게 되어 공격적이 되거나 회피하거나 하여 정작 인간관계만 상하고 본래 원했던 대로 인격의 변화나 개선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변화와 관계 개선의 출발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물론 문제에서 출발해야 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총체적 인격이고 그 안에 온갖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어우러져 있는 인격입니다. 그래서 우선 필요한 것이 그 사람을 총체적 인격으로 파악함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단순히 문제를 파악하고 분석해서 그 이유를 찾아내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단점을 찾아내고 비판하고 그걸 고치려고 아옹다옹 애를 쓰는 동안 우리는 그 인격의 긍정적인 부분을 완전히 부인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내 자신이 그런 단점으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어서 대처하는 하나의 방어기제가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오랜 세월 받아온 스트레스로 인해 부정적인 시각이 나를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문제를 가진 상대방이 아니라 그 문제를 파악하고 있는 나 자신의 시각이 그 문제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 문제 자체에 매여 있는 시각으로부터 상대방을 총체적 인격으로 파악할 수 있는 눈을 떠야 합니다. 상대방을 총체적인격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동안 내가 외면해왔던 그 사람의 다른 모습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좀 봐 줄만한 구석이 있어야지요.”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부정적인 시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긍정정인 시각이 열리면 그동안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던 것에서 정말 좋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얼마나 좋은 것이 많이 있는지 알게 됩니다.
이쯤에서 독자 여러분들도 스스로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자신과 배우자, 자녀들의 칭찬 할만한 점을 찾아서 적어도 30가지 이상 적어보십시오. 어떤 이들은 한 주간 동안 30가지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끙끙대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30가지 이상을 쉽게 찾아서 적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장점을 파악하는 게 힘든 일이었다면 그만큼 부정적인 시각에 매여 있다고 판단하면 됩니다. 우선 총체적으로 인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잘 보지 않으려 했던 것, 외면하려 했던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노력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지 상대방의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변화와 관계개선의 출발점은 상대방에게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인 것입니다.
긍정적인 것으로부터의 변화
상대방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시각이 변화되기 시작하면 그 변화는 상대방의 변화를 유도해내게 됩니다. 우선 변화의 초점을 문제에서부터 긍정적인 면으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너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하지 않는 게 문제야.”여기서 문제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이 상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머리만 좋으면 뭐하냐? 노력을 안 하는데.”라며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상대방은 노력부족에 대한 공격을 의식하게 되고 방어기제를 사용하게 됩니다. 자연히 마음의 문이 닫혀버리고 변화의 기회는 줄어듭니다. 부정적인 면에서 출발하는 것은 대부분 상대방의 자아를 공격하게 하고 상하게 합니다. 공격받게 될 때 모든 생체의 반응은 움츠리는 것입니다. 움츠린다는 것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본능입니다. 그래야 덜 다치니까요. 덜 다치긴 하겠지만 변화는 없습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면에서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네가 노력한 것에 비해 성적이 이 정도 나온 걸 보면 넌 확실히 머리가 좋아. 여기에 조금만 뭘 더 보태면 훨씬 나을 텐데.” 이렇게 긍정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할 때 움츠리지 않습니다. 움츠리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와 개선에 대한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두 번째 훈련을 시작합시다. 긍정적인 것을 먼저 얘기하는 습관을 기릅시다. 부정적인 것을 말하기 위한, 감추기 위한 사전 포석이 아니라 그냥 긍정적인 면만을 단순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찍 일어났구나. 오늘 얼굴 보기 좋은데.” 여기까지만입니다. 너무 나가면 “거 봐라, 일찍 일어나니까 얼마나 좋은 점이 많으냐?” 이렇게 이어지면서 그동안 늦게 일어나서 놓쳐버린 것을 지적하고 공격하게 됩니다. 그냥 단순히 긍정적인 그 사실만을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 훈련이 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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