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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10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김동진, 김기환, 이동철, 사공병도 신부

 · 소공동체 복음나누기 자료제공 : 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053) 250-3082 cafe. daum.net/biap

 

 

10월 7일 군인주일, 연중 제27주일 : 마르10,2-16 또는 10,2-12.
김동진(제멜로)|성정하상성당 보좌신부
 

2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13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미운 정 고운 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가톨릭교회는 혼인이 하느님 앞에서 서약한 불가해소성을 가지는 신성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가족의 해체와 이혼 증가 등의 모습을 보면서 혼인의 진정한 의미를 세상이 잊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혼인에 대해 생각해보니 예전에 긴박한 병자성사를 주러 병원에 갔던 일이 생각납니다. 60대의 신자 노부부 중 형제님이 병으로 수술을 하셨는데 감염이 되어 위독하게 되었고 그날이 고비라고 전해들은 상황이었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서 무의식중에 온몸을 비틀고 계시는 형제님에게 병자성사를 드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중환자실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자매님께서 우시면서 저에게 이야기를 한참 하셨습니다. 남편이 늘 당신에게 잘 대해 주었는데 자신은 거기에 대해 늘 조금 차갑게 반응했던 것을 후회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저는 일생동안 남편이 저를 더 많이 사랑하는 줄 알고 살았습니다. 늘 먼저 다가오고 싸워도 먼저 풀고… 그런데 이제 보니까 제가 더 사랑하네요. 그 사람이 죽으면 저도 못살 것 같습니다.”
다행히 병이 회복되어 지금은 부부가 행복하게 살고 계십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물들어가는 거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꼭 감정의 좋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로 들었던 노부부가 그랬듯이 부부는 삶의 고통, 어려움과 사소한 일상 속에서 겪는 섭섭함, 분노, 불신, 이해하지 못함 등등을 통해서도 사랑을 키워 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미운 정과 고운 정이 쌓이게 되고 그런 모든 세월의 역경이 혼인성사 안에 녹아들어 비로소 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혼인은 신성한 것이며 부부는 오직 이 관계를 통해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며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서로를 더욱 믿고 사랑해서 혼인성사 안에서 서로를 통해 구원을 받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10월 14일 연중 제28주일 : 마르 10,17-30 또는 10,17-27.
김기환(미카엘)|두류성당 보좌신부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8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선하신 주님, 당신 앞에 불러주심에 감사합니다. 또한 말씀 앞에 모인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저희도 주님께 당장이라도 달려가 여쭙고 싶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부족하나마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자 노력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불안함이 있습니다.
주님, 저희는 당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저희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알려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어느 부유한 사람이 예수님의 발길 앞에 무릎을 꿇고,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묻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고 선언하신 뒤, 계명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본디 십계명은 하느님께 지켜야 할 첫째, 둘째, 셋째 계명인 대신덕(對神德)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나머지 계명인 대인덕(對人德)이 있으나, 여기서는 대인덕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유한 사람은 모든 계명을 지켰노라고 말합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선한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아껴뒀던 말씀을 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바로 이 순간! 하느님을 향한 계명의 새로운 지평이 열립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내며,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계명을 지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굶주렸을 때 돌봐준 이들에 대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유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된 사람’ 혹은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계명들도 지켜왔고 부유한 재산도 있으니 그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기만 한다면 그가 그토록 바랐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주님의 가르침보다 그가 가진 많은 재물을 선택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렇게 잘 준비된 사람, 자격을 갖춘 사람도 마지막 결단의 순간에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도, 함께 지켜보던 제자들에게도 참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저렇게 준비된 사람도 흔들리니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불리움 받았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고 서로 수군대는데 정작 돌이켜보면 자신들은 어떤 준비도 없이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하고 부르시자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때를 상기시켜 주시고자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시자, 그제야 베드로가 나서서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어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 모인 여러분, 이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모아 주님께 기도합시다.
주님, 당신께서 이 땅에 가난한 모습으로 오시어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위하여 낮아지셨듯, 저희도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사랑으로 당신 앞에 겸손하고 이웃을 아끼게 하소서. 저희 생각이 아니라 주님 당신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10월 21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 마태 28,16-20.
이동철(대건 안드레아)|구암성당 보좌신부

16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사람을 만드시어 그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 사람을 만드시어 그들이 서로를 보완하며 살아가도록 해 주셨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풍족한 생활을 허락하시어 당신과 함께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죄를 범하여 하느님의 좋으신 뜻을 저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죄에 대하여 질책하셨으나 다시 사랑을 주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는 없었으나 하느님의 보호를 받으며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의 글은 창세기 맨 처음에 나오는 사람의 창조와 죄에 대한 이야기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묵상한 것입니다. 창세기의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생명을 얻고 살아가지만 때론 그 사랑을 잊고 살아가 죄로 인하여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립니다. 그러나 다시 자신의 삶의 소중함을 느끼고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까지 이 땅에 보내십니다.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십니다. 유한한 인간으로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을 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아시고 당신의 아들을 통해 사람들이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당신의 사랑을 이 땅에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사랑으로 사람들과 함께 하셨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셨으며 사회적인 죄에 대해서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말씀과 행적을 통해 알려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신이 보여주신 그 사랑에 모든 이를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우리는 그것을 이행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원래 사람이 만들어진 그 순간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만물은 근본으로 돌아갈 때 진정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하고 나약한 인간들입니다. 그 사랑을 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러한 사실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그 사명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유한하고 나약하고 부족하여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죽기까지 전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0월 28일 연중 제30주일 : 마르 10,46ㄴ-52.
사공병도(베드로)|동촌성당 보좌신부

46그들은 예리코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우리는 다시금 길을 나섭니다. 오늘 복음이 안내하는 곳은 바로 예리코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언저리에 자리한 예리코는 무척이나 오래되고 규모가 큰 도시이며,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해 하늘로부터 가장 먼 도시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도시 한가운데 서서 두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이내 소경이 됩니다.
우리가 자리하고 있는 이 도시는 무척이나 화려하고 번성하지만 이제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소경인 이상 그 어떠한 화려함도 우리에겐 어둠일 뿐이며, 그 누구도 자신들의 번성함에 우리가 끼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고립된 채 거대한 도심 속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소외된 이, 거지가 됩니다.
우리 소경들은 앞이 캄캄합니다. 그러기에 자리를 옮긴다는 것은 정말이지 큰 모험이며, 무언가 변화를 꾀한다는 것 또한 무모한 도박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머문 이곳이 비록 볼품없는 구석자리이고 바닥이지만 그래도 이젠 제법 익숙해져서 그럭저럭 지낼 만합니다. 게다가 쪼그려 앉아 마지막 남은 ‘내 것’인 겉옷을 덮어쓰고 있노라면 이따금씩 아늑함을 느끼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변하고픈 마음도 흐려져만 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웅성거림이 우리만의 아늑함을 방해합니다. 처음에는 겉옷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겨우 찾은 아늑함을 계속해서 탐닉할까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들립니다. 어느 구석 바닥에 있어도 알만큼 무성한 소문의 주인공 예수, 어떤 병도 낫게 하고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다는 예수, 누구나 반겨주고 아껴준다는 예수,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그 예수가 바로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십니다. 고작 소문 속 이름일 뿐인데도 마음이 동합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입니다.
이제 세상과의 내 마지막 창(窓)인 귀가 활짝 열려 그 이름을 쫓습니다. “예수가 이리로 오고 있다.”, “예수가 이곳을 지나 드디어 예루살렘에 간다.” 예수가 우리 앞을 지나간다는 소리에 이미 오래 전에 짓밟혀서 어딘가 안 보이는 곳에 내팽개쳐져 있던 희망이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웅성거림이 극에 달했을 때 우리는 망설입니다. 지금까지 이곳의 그 누구도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볼 요량이면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폭력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꿈틀거리는 마음속의 희망을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 깊은 곳에서 희망을 끌어다 큰 소리로 내뱉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들 하지만 강렬한 원의가 담긴 우리 목소리에 묻혀 들리지가 않습니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미친 듯 원의를 쏟아내고 있는 우리를 붙잡습니다. 혹시 또 폭력이 돌아올까 덜컥 겁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이제 겁은 눈 녹듯 사라지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마음은 이미 예수님 앞입니다.
그런데 몹쓸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너무 오래 쪼그려 앉아 있었고, 이대로에 너무 만족해버린 모양입니다. 사실 여기서 일어서 버리면 겨우 얻은 안락함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막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빛도, 미래도 없습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쌓았던 공든 성(城)을 이제는 무너뜨려야 합니다. 다시금 용기를 긁어모아 겉옷을 벗어던지며 벌떡 일어섭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뜹니다. 그러자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물들과 사건들이 보입니다. 보고 싶은 임은 보이지 않고 번잡함만 가득합니다. 실망스러운 전경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금 살포시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웅성거림 속에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다윗의 자손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몸을 돌려 눈을 뜹니다. 여전히 눈앞은 번잡하지만 이젠 가닥이 잡힙니다. 눈을 들어 그 너머를 바라보며 깊은 심호흡을 합니다. 그리고 큰 용기를 내어 발걸음을 옮깁니다. 우리의 희망이고 사랑이신 임을 볼 수 있는 그곳으로 말이지요.